나는 개인적인 사랑이나 다른 사람과 충돌하기 쉬운, 그런 불안한 사랑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인생은 몹시 쓸쓸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얻음으로써 다시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지고 새로운 생명을 낳고 이를 기른다.
하지만 이런 사랑만으로는 우리가 구원되지 못한다.
‘신(神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만이 우리의 생명을 다시 커다란 어떤 것에 이어지게 하여 영원(永遠)의 한 부분에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唯一)한 것임을 안다. 이런 사랑 없이는 우리의 생명은 차츰차츰 꺼져가는 힘에 지배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생명만을 집착하고 이해타산의 세상에 갇혀서 점점 어두운 굴속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신(神하느님)과 같은 사랑에 참여할 때 구원을 얻는 것이다. 신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수록 하느님과 우리가 이어질 때 우리는 사랑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제 생명을 초월(超越)하게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한다. 즉 우리가 우주에 녹아들 때 그 기쁨은 또한 각별할 것이다. 다만 그 융합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써 우리는 깊고 깊은 사랑을 느낀다.
사랑의 극치(極致)는 죽음을 아득히 초월(超越)한다.
사랑의 집착은 변하기 쉽다. 아집(我執)으로 치닫기 쉬운 일면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은 배타적으로 되기 쉽다. 적어도 다른 사랑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기 일쑤다. 그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한 쪽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다른 쪽을 버려두게 되고 의리와 인정을 잊기 쉽게 된다. 그것도 일시적으로는 그만 두기도 하지만 그런 연애가 오래 이어지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인생은 연애에 취해서만 지내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삶이다.
연애가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는 이는 벌레와 같은 사람이다. 보다 높은 사랑, 보다 차분한 사랑으로 즐거움을 얻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 현명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사랑하는 자식을 두고, 사랑하는 벗을 도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두고, 더욱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진리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러면서 인류나 신(神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는 행복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가 가는 곳마다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이런 사랑의 삶을 저해하는 것이 이 땅위에 많고, 더욱이 사랑의 가치를 진정으로 모르는 사상가가 많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아는 것이 구원된 인류를 만드는 제일의 조건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폭력(暴力)이 짜(조組)이는 것이야말로 두려운 것이다. 무샤노고우지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