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성욕의 차이는 성욕에는 상대를 존중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상대방의 운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녀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짐승 같다고 말한다. 연애는 상대를 존중한다. 상대의 운명을 마음에 둔다. 그래서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상대라야 흥분한다. 성욕은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흥분하지만 연애는 최상의 이성이라고 생각되는 때 흥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가 만들려는 최상의 자녀를 두려는 때에 흥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최상의 상대에게만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드래도 그것은 이상적인 경우이고, 그런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선 먼저 자기가 최상의 인간일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랑도 점점 현실적으로 되어 어느 정도에서 타협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올바른 연애는 자기가 접촉하는 이성이 최고의 상대라는 감정으로 되면서, 결국 자기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훌륭한 자식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느끼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어쩌면 자기와는 걸맞지 않은 상대를 연모하는 희극을 연출되기 쉬운 것이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좋아하는 경유일 테다. 역시 자기에게 자격이 없는 상대는 사양할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인간은 이상적으로 자기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길로 가지 않는 경우가 실로 많기 때문에 연애만이 이상적으로 사람을 완성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그와 상응하는데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좋은 상대를 고른다는 것이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
연애의 올바르지 못한 점을 일일이 여기에 쓸 수는 없다. 진정한 연애가 어떤 것인가를 앎으로서 자연의 의지가 무엇인가를 아는 하나의 방법으로 하고 싶다.
인간은 어떤 상대를 연모(戀慕)하는가? 우선, 첫째로 틀림없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을 연모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아름답다고 할까? 이 부분은 다른데서 알아보겠지만, 우리에게 눈을 만들었음은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아름답고 추한 것을 구분하게 할 목적이 있다고 보겠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갑(甲)을 보았을 때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을(乙)에게도 같게 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움에 애착하는 것은 자연의 의지(意志)다. 왜 그런가하면 아름답게 느끼는 능력을 인간에게 준 것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연은 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보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좋을 성싶다. 어쨌든 우리는 미인을 보면 황홀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지상에 넘치게 하려는 자연의 의지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열애(熱愛)하는 인물이 반드시 미남만은 아니다. 오히려 추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의 존경을 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도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자연은 이 땅위에 되도록 아름다운 인간을 많이 낳아 기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돈이라든가 혹은 다른 이유로 흉한 사람과의 결혼을 어딘가 모르게 부조화를 느낀다.
하지만 그 남자가 다른 어떤 특출한 남자라면 또 별개로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사람의 성질(性質)이 삐뚤어졌다면 그의 마음이 얼굴에도 드러나게 되므로 비뚤어진 사람이 아닌 한은 어딘가 좋게 느낄 수 있는 점이 나타날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어딘가에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정도껏 이루어진다.
그런데, 아름다움만이 우리의 연모(戀慕)의 마음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나면서 차츰 좋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 또 차츰 서로 존경할 수 있는 점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진정한 연애는 마음의 일치가 돼야 한다. 체질도 서로 조화시킴이 필요할 것이다. 양쪽이 서로 사랑하면서 다가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연애특성은 쌍방이 자기의 인격을 높이는 노력을 할 것이다.
상대가 좋고 상대에게 존경받으려면 더욱 자기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발분(發憤)할 힘이 생긴다.
마음이 가다듬어진다. 책임감을 갖게 되며 실력을 키우게 된다.
연애는 사람이 독립할 자격이 갖추어졌을 때에 느끼는지만, 우선 정신이 가다듬어지는 때이므로 실수 없는 자연은 연애시킴과 동시에 사람을 다듬는 일을 잊지 않는다. 기쁨과 쾌락을 주는 대신 그만큼 책임을 지는 인간으로 다듬기 위해서 자연이 마음을 쓰는 것이다. 연애결혼은 결과가 좋지 않은 경향도 있지만, 이는 서로 경박(輕薄)한 연애에 취하여 된 결과가 많은 것 같다. 참된 연애는 서로 사랑하게 된 전혀 남남인 사람이 기쁘게 부부가 되어 서로 존경 받을 수 있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자녀를 얻기 위한 것이다. 성욕만으로는 좋은 자녀를 얻기에는 부적당하다고 자연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가 결혼 후에도 내내 이어지지 않음은 당연히 거치는 것이고 좋은 현상이다. 인간은 언제나 연애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연애는 한 때이기 때문에 강열(强熱)하고 그래서 귀한 것이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연애할 수 없는 것이냐는, 사람에 따라 그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 확실하게 연애를 알고 결혼했고 그래서 늘 사이좋게 지내며 훌륭한 자녀를 얻어 기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누구보다 잘 조화된다고 생각한다. 부부의 차분한 애정과 자녀에 대한 아름다운 애정, 여기에서는 처지지 않는다.
자연이 인생에 연애라는 것을 준데 대해서 재대로 이해하여 속임수가 있는 연애는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제3자가 주의 할 일이지만 그 주의는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함이 필요하다.
육욕의 많고 적음은 연애의 열도(熱度)를 바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욕의 노예는 자기의 인격이 얼마간 깎인다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진실한 연애는 그 사람의 인격을 오히려 높이는 것이지 낮추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허투루 처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