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사물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느끼도록 하기대문에 느끼고,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차리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자연이 의미 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또 아무런 뜻도 없이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때 인간을 즐겁게 하고 필요한 때 또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다가 약하게 하거나 해서 인간을 이끌어 나간다(는 것을 독자에게 확실하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자연이 인간을 살리고 싶은 것처럼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를 잘 이끌어갈 사람이(란 것을 나는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확실한 예증을 들어서 이때까지 얘기 했고, 앞으로도 두세 번 이런 예를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주어진 것 중에 제일 두려운 죽음도, 인간육체의 고통도 마찬가지로 단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기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고, 되도록 그 사람을 오래 살도록 하기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준 것은 인간이 아닌 것임은 알고 있다. 이것은 자연에서 주어진 것인데, 만약 인간이 자기마음대로 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도록 만들었다면 인간은 바로사멸 되고 말았을 것이다. 즉, 죽는 것이 고통이 아니고, 두렵지도 않고,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이 귀찮아질 때면 누구라도 죽어간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견지에서 자살은 안 된다고 해도, 잠이 올 때 자도록 되어 진 것처럼 된다면, 살아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른다고 하드래도 인간을 만들어낸 힘이 얼마나 인간을 살 수 있는데 까지 살리려고 하는지는 죽음의 공포의 세기(强)로 알 수 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람이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을 어떻게 하든지 살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개인이 죽는다는 것을 자연은 알고 있다. 결코 개인이 죽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생명으로 위탁 밭고 있는 것이다. 즉 각자는 하나의 생명을 맡아놓았다. 그것을 잘 살려가든 나쁘게 살려가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인 것이다. 자유라고 해서 절대적인 자유는 아니지만 전부 맡겨진 것은 사실이다. 어느 주인의 돈을 맡기면서, 이것을 주니 좋게 쓰도록 하라는 명을 받은 아랫사람과 같다. 무엇을 사든 좋다. 그러나 그 산 것으로 해서 그 사람의 슬기로움과 아둔함을 안다. 유익하게 쓰던 해롭게 쓰던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마음에 들도록 쓴 사람은 주인에게 신용을 얻고 또 사랑받을 것이다. 돈을 주인의 뜻에 맞지 않게 쓰는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냉대 받을 것이다. 우리는 맡은 생명을 자연에게 사랑받도록, 생명의 왕에게 귀염 받도록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이다. 물론 운(運) 불운(不運)도 있을 것이고,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장수 하거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거나 쾌락을 많이 맛보는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드래도 마음은 공허하고 저 깊은데서 오는 생명이 즐거움은 차차 인연이 끊어지면서 자연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기분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러니 이제는 죽어도 좋다고 하는, 차분한 기쁨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주어졌지만 그래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누구든지 죽음의 공포를 맛보지 않고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이다.
자연으로부터 죽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때에 죽는 사람에게 죽음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은 때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사명을 다하게 하기위해서다.
건전한 죽음은 편안한 죽음인 것이다. 무리하게 죽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해서 죽음의 공포를 맛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직 살아서 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아네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의 수명(受命)의 몫을 다했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허락받는 것이다.
또 하나는 죽음을 뛰어 넘는 생활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을 희생해도 좋다는 일에 부닥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죽음을 자연이 기꺼이 바랄 때 그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의 생명이 구해질 때라든지,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된다든지, 또 그 사람이 죽음으로 그 사람의 의무를 다할 때라든가 할 때, 그 죽음은 삶 이상으로 이롭다고 사람들은 그를 자연스럽게 찬미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추기며 또 그 일이 계속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도, 자기 주인이나 선생을 위해서 죽는 것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이 허락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방법을 자연이나 인류가 바랄 때에 한한다.
자기의 책임 하에 맡겨진 어린이를 구하려다 죽었다는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다.
어머니가 자식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한편으로 슬프기도 하다. 더군다나 살아 있어야할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럿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면서도 태연하게 여겼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고 용맹스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보다 평화로운 죽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낸 사람의 죽음이다.
소크라테스는 독살되었지만 실로 철학자다운 평안한 죽음이었다. 제자들은 슬퍼했지만, 이 때, 위로한 쪽은 소크라테스였고 위로받은 사람이 오히려 살아남는 제자였다.
제자가 죄 없이 죽는 스승을 위로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너는 내가 죄가 있어서 죽기를 바라느냐?”
고 했다고 듣고 있다. 그 죽음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죽음을 쓴 곳에 “어차피 건너야 할 사람이니 건너가 버렸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할 일을 다 한사람의 죽음처럼 편안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여야 할 일을 아무 것도 안 하고 먹보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살면서 할 일을 다 한 때는, 죽음은 공포의 그림자를 들어내지 않고 반가운 자태를 보이든가, 뭐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옛날부터 적잖이 있어왔다. 이름은 애석해도 죽음은 애석해하지 않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죽음의 두려움은 참을 수 없지만 이것을 자연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준 것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에 따라 죽는 길을 태한다면 죽음은 개선(凱旋)이 되는 것이다.
자기를 잘 살려가지 않고 사리사욕만으로 살아가면서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리다.
인간은 당신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지어진 주제에, 자기에 집착하면 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죽어야 하는 것을 자연은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살 수 있는 데까지 살려서 그 사람의 진가(眞價)를 되도록 이 땅 위에 토해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이 땅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될 수 있는 한 해 내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서 그 사람이 최상의 삶을 산다면 자연은 그 이상의 것을 인간에게 바라지 않고 그 사람에게 죽음을 이길 특권을 주는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