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욕을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동시에 성욕으로 방종한 결과는 죄악에 이르기 쉬우니 삼가는데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기쁘게 여길 일이므로 결혼과 탄생은 축하할일이다. 그러므로 성욕을 죄악시 할 수 없는,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다하는, 크나큰 본능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본능이 어찌하여 범죄시되기 쉬운가하면, 무책임하게 자식을 낳아서 사회가 혼란스럽게 되면 그 사회가 지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자식을 만들기가 쉽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자식을 낳아놓기만 하면 혼란만 인다. 해서 사회는 무책임하게 자식은 잉태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죄악시하는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의 연애는 누구에게나 동정 받아야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인 연애는 그렇게 제 삼자에게 동정 받지 못하고, 아름답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편향이 심하다. 그것은 섬나라고 인구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연애를 경원시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책임하게 자녀를 잉태하는 것은 태어난 아기에게도, 아기부모에게도, 또 사회에서도, 그들을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무책임하게 잉태시킨 자녀가 훌륭히 커서 사회 일원이 된 경우도 있지만그렇다고그렇게 장려 할 만 한 것은 못된다. 그저 감사하는 정도면 족할 것이다.
이래서 성욕이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고, 그 때문에 성욕을 죄악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는 인간에게 성욕이 너무 지나치게 주어져서 부끄럽게되어, 얼만가 통제되도록 되어 있다. 이 부끄러움이 본능적 죄악감이 생기기 쉽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성욕은 인간을 생육(生育)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인간에게 주었다. 용의주도한 자연은 어떻게 하든지 인간을 이 세상에 불리기 위해서 성욕을 과도하게 인간에게 주었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까지 살아 온 인간은 성욕이 약한 인간의 종자가 아니고 강한 종의 후손이기 때문에, 대체로 성욕이 과하게 주어졌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열 자식 낳은 사람이 많지만 남자의 성욕은 열 자식을 낳기보다 훨씬 넘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잘 모르지만.
또 이런 성욕의 과잉으로 인한 병적인 것과 부자연스런 것을 잘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는 거간꾼이 있어서 점점 이 욕망이 과장되는 것도 사실이다.
런가하면 한 편으로는 성욕을 과장으로 범죄시하여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을 인생의 미덕의 주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성욕의 방종은 생리적 태만자로 마들고 또한 죄악을 범하게 하기 쉽다. 삼갈 것을 가로 막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연이 우리에게 많은 성욕을 준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다. 공자는‘색을 즐기는 만치 덕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만, 자연은 인간만이 아니다. 때문에 이 성욕을 짐승의 욕심이라고 하는 말까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날까지 갖가지 시대를 겪어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성욕이 약했더라면 인류는 이미 과거에 사멸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류의 사멸(死滅)을 기뻐하지 않도록 되어있는 인간으로서는 이토록 성욕이 약해지지 않는 것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아울러서 조심해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욕망의 모순이 있어서 사람들이 이 욕망을 갖고 여유를 부리는 경향조차 있다. 그래서 그 반동도 일어나고 또 그 반동으로 하여복잡한 층을 만든다. 여기에 또한 역겨움이 있고 재미있는 면조차 있다.
인간은 자식을 키우기 어려울수록 이 성적 욕망은 채우려 하면서도 자식은 생기지 않기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인간다운 면이긴 하지만 자연의 의지와는 상반(相反)된다. 그러나 원래부터 자연이 과도하게 인간에게 준 성욕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것을 적당히 조절하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해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조절방법이 문제이지만 그에 관해서는 각 개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성욕에 관한 문제를 공공연하게 서로 말하기에는 아직은 비밀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비밀스러운 데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타락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세상을 추하지 않게 산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에도 이 욕망을 죄악시하는 잘못의 원인이 하나 있다. 요컨대 이 욕망은 인류에게는 중요한 욕망이기에 사람들은 이를 되도록 존중하여 건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타인의 운명을 흠내지 않고, 무책임하게 자녀를 임신시키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금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엄연하게 주장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그러나 성생활 잘 해내서 훌륭히 마무리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네오날드다빈치나 미캘란제로의 일은 적어도 금욕생활을 보낸 습관이 붙은 사람이여서, 비로써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보통의 생활 방식으로는 그렇게 까지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들의 정신력은 초인적이었다. 베토벤의 작품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인지는 말 할 수 없다. 금욕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금욕과 함께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인이 성욕을 죄악시하여 금욕생활을 하는 것도 그로 인하여 강인한 정신력의 가다듬기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형식적인 금욕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면 그 금욕생활을 칭찬하기는 어렵다. 대나무 통 안에 넣은 뱀이 곧바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뱀에게도 자만이 될 수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다.
또 사람의 성욕도 식욕과 함께 자연이다. 그래서 식욕이 부끄럽지 않은 것처럼 성욕도 부끄러울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식욕은 많은 사람과 함께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의 운명을 그르치게 하지 않는다. 또 지나치게 먹을 염려는 있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미혹(迷惑)을 사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욕은 상대가 있다. 상대가 즐겁더라도 아이가 생길 염려가 있다. 또 주위와의 부조화도 있다. 물론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장삿속 상대도 있지만 이것은 그 사회의 병폐로 희생되는 사람인 것이다. 즐겨서 하는 상대는 아닐 것이다. 혹 좋아서 한다 하드래도 거기에는 부자연스런 데가 여러가지 있다. 돈이 드는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그 외에 성욕이 함께하는 부끄러움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기분이니 그것을 무시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우리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것들이 공공연히 대로에서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뒤죽박죽될 것이다.
성욕을 과도하게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은 이를 또한 제어하고 무책임한 자녀생산이 되지 않도록, 또 그를 위해서 남녀 관계가 멋대로 되지 않도록, 한편으로 주의를 잊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중용이 필요해서 넓은 아량으로 내다볼 필요가 있지만 방종하지 않도록, 특히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욕이 자녀를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남녀 사이에 행해질 때 사회는 이들에 축복하고 자연도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삼갈 것을 권유할 밖에 없고, 그 뒤의 일을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너무 시끄럽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잘라 없애기는 어렵다. 단지 희생자가 없도록 함께 마음을 써야할 할 일이다. 그래서 삼가도록 하는 주위(周圍)를 만들 필요가 있지만 시끄럽게 하면 오히려 들통이 난다고 생각한다.
껄끄러운 문제자만 신용하기만 하면, 어찌됐던 각자가 잘 해결해나갈 것이 틀림없다고 보겠다.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고 혹 그런 희생자가 나면 보호해 야 하는데, 보호를 의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성욕을 범죄시 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그러나 훌륭하게 금욕생활을 하고서 그 힘으로 다른 유익한 쪽에 돌리는 사람에겐 찬미할 것을 잊고 싶지 않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