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직 죽을 자격이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살아서 일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죽을 각오가 정말로 되어있을 때는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고, 그 각오에 비례되는 죽음의 공포가 강약(强弱)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좀 더 살아야지 하고, 좀 더 살고자 할 때 죽음의 공포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간은 어쨌든 살고 싶어진다. ‘개죽음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있는 데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서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보람 있는 죽음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죽는다면 훌륭하게 죽고 싶다. 죽어버리면 모두 같다고 하는 핑계도 있음을 알지만 죽음의 본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명예롭지 못한 죽음보다 훨씬 강하게, 절대적이라고 할만치 강하게 바라도록 만들어졌다.
개인의 죽음이 최후를 의미하려면 죽음이 명예롭거나 불명예스럽거나 매 한가지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연은 한사람의 죽음 이상의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완성이 그것이다. 앞날이 요원(遼遠)할수록 인류는 완전(完全)을 향하여 성장하려고 한다. 개인은 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개인이 죽어도 그것이 다른 개인이나 전체를 보다 잘 살게 하기위해서 그 역할을 한다면 족한 것이다. 희생이 미덕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 본능에 의한 것이다. 결국 개인은 자기를 위해서 살 것을 자연으로부터 명받은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살아가도록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비상시에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조국이나 인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때는 그 사람의 죽음이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숭고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 이상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은 당연하며 아무렇게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래서, 인간은 수명을 다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의 유약함을 다른 사람에게 느끼게 한다. 다만 자기가 살아있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폐가되지 않기 위해서거나, 자기의 책임을 통감하여 자살한 사람은 동정을 살 수 있다. 또 자기가 자살함으로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거나, 전시에 성이 함락되어서 자살한 성주의 이야기 같은 것은 미담으로 여겨도 족하다. 그러나 자기 개인만을 위한 자살은 아무래도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동정(同情)될 때는 있다. 또 자살하는 사람보다 훨씬 못하고 저질인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므로 그런 사람보다는 좋은 느낌이 있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의 생명을 멋대로 줄여서, 이런 저런 일을 이 땅위에 남기고 싶어 하는 이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은 언짢게 생각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것은 개인이 사적(私的)감정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인류가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자살했기 때문에 용기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 못된 것이다. 육체에 고통이 주어졌기에 육체를 훼손시킨다거나 고의로 병치레를 하는 것을 용기 있다고 하는 것과 같고 이런 행위는 바보스러운 짓이다. 죽음의 공포가 주어진 것은 인간을 오래 살리도록 하기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뜻에 올바르게 따라서 사는 것이 진실 된 삶이다.
하지만 살았더라도 식충(食蟲)노릇이나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살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불편함을 끼친다거나 괜히 소극적으로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여기며 죽고 싶은 사람도 얼마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역할이라도 해야 하므로 살았더라도 아무 쓸데도 없이 아니, 살면서 자녀들에게도 폐해를 주는 경유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죽음은 내 몸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는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뿐이라면, 사는 것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방면에서 힘이 빠져 나가면, 사는 흥미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각오로 어떤 작은 것일지라도 좋으니 자기를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쓰고, 이제 까지 지녔던 나쁜 마음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새 삶으로 들어감으로써 사는데 흥미를 찾게 될 것이다.
이런 죽음의 공포보다 못한 생활자가 이 세상에 있다. 그래서 자살자가 끊이지 낳는다.
또 연애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죽음 이상의 힘이 있기 때문에 깊이 빠진 이는 비교적 죽음을 뛰어 넘는 것이 즐겁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약점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죽음의 공포’를 그대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첫 걸음은 건강을 중히 여기며 오래 살면서 자기가 지닌 가치를 살려내는 시간을 획득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노력하드래도 빨리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때는 무엇인가에 자기 몸을 맡기고 자연의 품에 편안히 안겨서, 사랑을 주위 사람에게 줄 수 있는데까지 주고 돌아갈 밖에 도리가 없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