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대해서 말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우선 고통을 느낄 때에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를 조금 이야기 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기나 다른 사람의 건강을 말할 나위없이 중히 해야 한다. 육체의 고통은 인간이 건강하지 못할 때 느끼는 것으로, 그 아픔을 낫게 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여러 번 말했다. 아무리 고통을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이 사망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죽기위해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다. 그러니 고통 속에 죽는 것도 결코 보아 넘기기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자연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고통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죽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고통을 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곡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살리려고 하여 고통을 주는 것뿐이지 죽이기 위해서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살리고 싶은 데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아픔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조차 참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로 일하고서도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는대서야! 인간은 불상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낫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죽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인간은 사는 고통을 참아내지 못해서 자살자가 많아질 터이니 지금처럼,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류가 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해서, 죽음에는 상당한 고통이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죽음은 무어라 하드래도 육체의 멸망이기 때문에 육체의 최후의 고통인 생사와의 싸움은 그만둘 수는 없다. 당연히 죽음 그것의 고통은 진정 없고 오히려 죽음의 순간은 황홀한 쾌감조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병들거나 다치게 돼서 고통 속에 죽음을 맞는 이도 적지 않다는 생각에 미치면 자지러진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해서 자연이 인간을 악의로 고통을 주려고 한다기보다는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데 까지 살리기 위한 필요에서 이룩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옳겠다.
나는 인간으로서 편안하게 죽고 싶다. 그렇지만 사는데 까지 살기 위해서 고통을 없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문명으로 나아가면서 차츰 죽음의 고통도 사라지리라고 본다. 허지만 그 것은 살 수 있는데 까지 살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자연이 죽음을 허락한 것을 무리해서 주사를 주어가면서 조용한 잠을 방해하는 것은 산사람에 대해서는 자연스런 것이지만 죽는 사람에게는 혼란스레 헤매게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건강해진다면 좋지만, 단지 임종을 늦추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살아남는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이 지상에 있게 하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인정이기에 이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죽는 이로서는 할 말이 없을 성싶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