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목적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니 연애의 진정한 맛은 그 목적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은 확실히 열매를 맺으려고 핀다. 하지만 꽃의 아름다움이 열매와 이어진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마음은 인생의 꽃이므로 그 아름다움은 시나 음악으로 어느 정도 드러난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목적을 풀어내는 것으로 설명(說明)될 수 없다.
그래서 연애의 가치를 그 효과만으로 설명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직 목적은 목적으로만 알아야할 뿐이다. 그래서 연애가 어떻게 인생에서의 아름다운 꽃인가를 아는 것이 연애의 가치를 아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생에서 연애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무미건조해서 문학 미술의 세계는 훨씬 빈약해 있을 것이다.
연애는 인생의 시고 꽃이다. 기쁨이고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소설속인물의 사랑에 즐겨 눈물을 흘리며 함께 걱정하는 가하면 또 기뻐한다. 단테에 있어서도 피오트리체는 단테를 신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갖고 있었다. 참다운 연애는 그런 힘이 있다.
내가 여기에 연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찬미할 힘은 없다. 허나 연모(戀慕)는 확실히 인간을 영원으로 이끌어 들인다. 연모(戀慕)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꽃봉오리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헌신적인 이성의 사랑은 그 사랑이 모성애만큼 드맑지는 않지만, 보다 열렬하여 초(超)생명적인 힘조차 갖고 있다. 연모하는 사람의 헌신적인 사랑의 아름다움, 또 믿음을 주는 데 대한 남성적 용기, 함께하는 순수하고 열렬한 애정은 생명조차도 아끼지 않는 힘을 갖고 있다.
자연이 어떻게 인생을 만들고 있는가를 보다 강하게 노골화해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성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연모(戀慕)하는 사람은 동시에 시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냉정하게 보면 한때의 열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처럼 헌신적이고 순수하고 열렬한 감정을 아무렇게나 맛보아서는 안 된다.
확실히 연애는 자연이 인간에게 넘겨준 보다 아름답고 미묘한 한 선물이다.
때문에 이를 맛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으로 맛보는 사람은 의외로 적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성욕이 연애로 까지 변화되기 전에 결혼하고 마는 것이다. 더욱이 사회의 습관에 따라 연애를 맛보기 전에 결혼하고 마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않고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초목이 있다. 인간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않고도 훌륭한 열매를 맺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왕 꽃을 피우려면 아름답게 피워서 꽃도 열매도 함께 훌륭하게 피고 맺는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편 실연한 사람을 긴 안목으로 보아서 반드시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연(失戀)으로 해서 오히려 훌륭한 사람으로 된 이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는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자식을 잃어서 잘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실연은 자식을 잃은 것과는 좀 다르지만 그 슬픔과 쓸쓸함은 자식을 잃은 마음에 뒤지지 않는다. 그냥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과, 그 뒤에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자녀가 생겼을 때에 자기가 실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귀여운 자식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 자식이 귀여울 때라든지 불쌍하기라도 하면 그 자식이 태어자지 않았을 일을 생각할 수 없어서, 결과적으로 실연한 것이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실연해도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다면 연모(戀慕)한다고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
사랑은 보다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목적을 달성하기 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연애가 인생에서 유일한 일일수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훌륭한 자식을 낳는 것, 그것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전부는 아니다. 특히 남성에 있어서는 부업인 것처럼 여긴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성에 있어서는 좋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어머니로서는 그 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