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그럴듯한 논리를 붙여보면 하잖게 볼 수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벌레의 생활과 그렇게 다를 게 없다. 재연의 견지(見地)에서나 우주적 관점에서나 우리의 생사(生死)는 문제 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도 자연의 눈으로 보면 영(零)과 같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으니 여기에 오묘함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백수(白壽)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오래 산 것처럼 놀라며 무언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처럼 느낀다. 팔구십 살을 살아도 상당히 오래 산 것처럼 여긴다.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인생의 길이는 잴 수 없을 만큼 짧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 되었다. 우리는 두 개의 팔을 갖고 있음에 만족하고 두 개의 눈과 하나의 코로서 만족하고 있다. 이것은 그 것으로도 만족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 개의 눈이나 네 개의 눈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의 후각이 개의 코처럼 예민하지 않다고 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후각을 만족한다.
우리는 창조된 대로 만족하도록 돼 있다.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인간이 제멋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재미있는 면이고, 여기에 인간의 구원(救援)이 있다. 주관(主觀)은 인간이 아무렇게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느껴지도록 자연(신神)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조심스레 제기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멋대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만들어낸 이를 즐겁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의 벌(罰)이 내린다. 몸을 중히 여기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데, 끝내는 인간은 죽기 때문에 병(病)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핑계를 댈지도 모르지만, 병을 앓으면 심약(心弱)해지고 회복되는 동안 어렵게 되며 참으로 불쾌해 진다. 그러니 병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이 회복되면 원기 있고 좋은 기분으로 된다. 이것은 변명(辨明)이 아닌 사실이다. 우리가 게으르면 어쩐지 모르게 마음이 공허해지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럴 때 발분(發奮)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또한 사실이다. 기가 꺾인다는 것, 축 늘어져 지내기는 정말로 싫다. 하지만 팔팔하게 지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사람은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기를 향상시킬 여가(餘暇)나 여력(餘力)이 있다면 자기를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는 왠지 유쾌해지고 보람이 있고, 알찬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람 부는 대로 떠돌면서 무의미한 생을 사는 것으로 족하다는 사람은 적어도 그가 사는 동안에는 취생몽사(醉生夢死)도 좋다, 는 삶으로 되는 것이다. 원기(元氣)에 맡기면서 인류의 운명에서 헤매며 떨어져 나가도 따로 벌을 받지 않고 살지도 모른다. 도덕은 법률이 아니다. 운명(運命)이나 자연(自然)은 인간사(人間事)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인이 번영하고 착한 사람이 망하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악을 행하여도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악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선도 이 세상(世上)에서는 벌을 받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별 개로 치고서, 우리는 악을 행하고 벌을 받기 보다는 선을 행하고 벌 받는 것을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이끌고 있는 내적 마음의 방임인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마음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때로는 놀랠지도 모르지만 정신은 놀라지 않는다. 악할 때는 나쁘다고 말 할 뿐이다. 그러나 악하지 않았을 때를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하는 그 무엇이다.
다른 이를 재단함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우리는 이에 승복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내적 활동은 우리를 속일 수 없다. 마음이 공허(空虛)해지거나 가책(苛責)하거나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옳을 때는 그 반대로, 우리를 내적권위 속으로 이끄는 느낌조차 얻게 된다.
고맙다고 생각할 때는 고마운 것이고, 활기찬 때는 활기차 있는 것이며, 유쾌한 때에는 유쾌해있는 것이다. 마음이 만족스러울 때 무리(無理)로, 불만(不滿)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려고 해도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자연으로 부터 허락된 느낌인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에 승리감을 갖고 개선(凱旋)하는 기분으로 죽을 수 있으면, 그것은 죽음을 이긴 것이다.
인간은 돌덩이가 아니다. 인간은 또한 산이나 바다와 같지 않다. 인간은 감각과 감정을 자연으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무의미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실로 인간에게만 합당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 천부(天賦)적인 것을 존중하여 그에 의해서 인생을 긍정적(肯定的)으로 살아야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의 마음이 복잡하고 인간의 욕구 또한 복잡하며, 느낌도 복잡한 점이다. 다른 생물은 자기 마음의 조화는 문제시 하지 않는다. 또 자연이 내린 여러 가지의 재료를 인간처럼 이용하며 살아가지 못한다.
이처럼 그들은 간단하고, 단순하다. 그들도 행복할 뿐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육체만은 건강하고, 죽음의 공포만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번민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 나름의 사회성이 발달된 것도 있어서 전체적으로 서로 협력해 나가는 패거리가 있다. 개별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것도 있다. 벌이나 개미가 그 좋은 예다.
거기에도 어떤 도덕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능력은 인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영(零)에 가깝다. 적어도 본능에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본능에 의해서 끌려서 휘둘리긴 하지만, 그들보다 모든 방면에서 발달할 수 있는, 그래서 곧잘 현명해지고, 말재주도 부리고, 곧잘 가지가지를 아는, 머리통이라고 하는 것이 주어졌다. 실로, 이토록 물질을 조합하는 것은 불가사의 한 것으로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법칙 같은 것도 사실이기에 인정하지만, 그래서 불가사의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인간은 미묘하게 지어져 있어서, 지상에 있는 것과 천체에 있는 여러 가지를 알고, 또 이것들을 자기들 생활에 응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오늘에 와서, 인간이 어느 정도를 발전해 나아갈지 지금은 가늠할 수 는 없다.
이만큼의 능력을 받았으면서 도리어 인간은 자연의 의지 - 하느님의 의지이랄까, 신의의지랄까, 하늘(天道)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잃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사회의 병폐를 이용해서, 일하지 않고 보상만을 받으려고 한다. 맛있는 음식과 향락을 얻기 위해서, 배가 부르다고 불평하고, 성욕의 쾌락을 보다 많이 누리기이위해 자식을 낳지 않고 쾌락만을 훔쳐 내려고만 생각한다. 일을 잊고서 주인으로부터 명받은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려는 못된 사내처럼, 세월을 보내면서도 자연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불평하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태어난 이상은 살려주는 것이 당연하다.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또 불행을 맞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한다. 마치 태어날 때 신의 감언이설에 실려 태어난 것 같은 얼굴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神:하느님)에게 속아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맹목적으로 다른 이를 제치고 태어난 것이다.
물론 태어난 책임을 시끄럽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멋대로 벌레 같은 요구를 할 자격은 없다.
그렇게 할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받고 있음을 기뻐하며 이를 잘 가꿔서, 마치 바이올린의 명인이 네 줄을 타는 것처럼 잘 살려서, 생명을 긍정하는 곡을 일생을 바쳐 키려고 하는 노력을 할 밖에 없다.
이것을 이룩한 인간이 성인이고 철인이고 현인이다. 또 시인이고 예술가인 것이다. 또 인간의 교사이고 뛰어난 사람들이다. 하찮은데 돌을 놓으므로 해서 운명의 바둑에 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