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은 하나같이 무드는 없다. 그로인한 죄악(罪惡) 또한 없다. 다만 그 본능이 정도를 넘어서 병적으로 될 때에 죄악이 생긴다. 색욕(色慾)도 인간에게는 중요한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태어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싫어하는 데도 범하는 것은 죄악인 것이다. 식욕(食慾)또한 인간의 자연성(自然性)으로 본능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이 귀찮아지고 또 먹을 것을 얻어내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결국 먹는 것이 귀찮아지다가 마침내 건강을 해칠 것이다. 또 식욕이 없어서 무엇을 먹어도 맛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것을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면 매우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 병중에 무리하게 먹으라고 권해도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다행이도 식욕이 돌아오면 미각(味覺)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즐기며 제대로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즐기면서 건강을 지켜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식욕은 중요한 본능이다. 허지만 식욕에 지나쳐서 배를 앓게 한다거나 먹는데 욕심을 내서 남의 돈을 훔치거나 먹을 것을 훔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먹을거리는 일함으로서 얻어지므로 이를 게을리 하면서 얻으려고 한다면 벌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본능도 인간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본능으로, 대단하지만 이를 자칫 잘 못 다룬다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또 이런 저런 본능이 있지만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하여 인간이 잘 살아가게 하는 데는 또 별도의 어떤 역할이 있어야 필요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이 역할을 다하는 것이 이성(理性)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게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이성은 이 본능을 제대로 잘 다스려서 인간을 건강하게 생장(生長)시키면서 다른 사람의 생장(生長)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곧 이성(理性)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인간은 조금은 냉정하다. 그리고 분별력이 있다. 잘못을 적게 범한다. 그리고 예의를 지키며 바보스런 일은 하지 않는다.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능은 약(弱)하지 않다. 오히려 그 본능(本能)을 제어(制御)하고 있다.
의마심원(意馬心猿)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자주 노(怒)하고, 시샘하고, 원망하고, 질투하고, 이런 저런 격정(激情)에 휩싸이기 쉽다. 이성은 이럴 때에 그 사람을 지켜주고 잘못을 법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위해서 있다.
제자가“군자는 궁(窮)해야만 합니까?”고 물었을 때 공자는 “원래 군자는 궁하니라. 그러나 소인(小人)은 궁하면 날뛴다.” 고 했다.
소인은 이성이 약하기 때문에 궁하면 곧 이성을 잃고 자기를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군자는 아무리 궁해도 자기를 버리려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고 이성도 잃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이 무의미하게 본능을 질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또 생명의 활력을 약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활력을 보다 유효하게 살려 가기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세상이 무섭다든지, 험담 들기를 싫어한다든지, 오해를 꺼린다든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하는, 그런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이성(理性)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제재를 가하면 그냥 좋지 않은 일을 안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눈길이 없으면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이고, 자기의 생활이나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이끌어가지는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그 때 그때 사회의 대세에 지배당하고 이럴까 저럴까하면서 그렇게 나쁜 짓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며 인간을 선도(先導)하고 문명을 끌어가는, 그런 힘은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이성적인 사람은 사회의 제재(制裁)보다는 보다 확실한 자각(自覺)하에 자기의 이성에 이끌려서 나아갈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까하는 것은 그렇게 마음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선악(善惡)정사(正邪)의 관념(觀念)을 확실하게 가르치는 쪽의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높은 이상을 향하여 이끌어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또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이지만, 그가 청년들을 유혹한다고 해서 고소(告訴)당하여 재판을 받지만, 그때의 재판은 시민이 아니고 오히려 재판받는 소크라테스가 재판 하였다. 그가 훨씬 이성적이고 그가 말하는 것이 인간 본심이었다. 그래서 이성적이다. 때문에 재판 받는 쪽이 소크라테스가 아니고 재판하는 쪽이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되었다. 그는 너무나 권위가 있어서 오히려 반감을 사서 사형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사회보다도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죄인과 병적인 인간은 사회에 이성적으로 이끌리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해서 법률에 의해서 이런저런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정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일반적(一般的)인 것보다 훨씬 이성이 발달한 사람을 사회에서 이끌어 갈 때는 오히려 반이성적(反理性的)으로 되어서 그 사람이 도리어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을 갖게 된다.
이 힘은 약하게 보이지만 곧 승리를 얻을 것이다.
인간은 이성에 쫓을 수 없을 때에도 이성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야하며, 그 것을 존경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것은 인간이 바른 자세로 생장(生長)하기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