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몇 번씩이나 어머니의 사랑과 자녀들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이성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아니다.
연애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사람과 만나서 인생의 문을 열어감과 동시에 다른 세대를 짊어질 새사람을 낳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는 결혼으로 그 매듭을 짓는 것이다. 물론 결혼함과 동시에 연애가 끝난다는 것은 아니지만 열렬한 연애는 결혼과 함께 마감됨이 당연하다. 이어서 부부의 사랑이 일지만 차분한 쾌락이라기보다는 보다 솔직한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연애병환자는 결혼을 두려워한다. 또 결혼생활에 실망하고 다른 연애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얼마쯤은 이런 연애병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무엇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데 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부부사이에도 성욕을 억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욕을 보다 건전하게 행할 것이며 충분하게 하면서 자연에게 만족하도록 하는 것이 허용되는 이상 이것 또한 일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부여받은 것을 무엇보다 건전하게 살린다면 사회도 이런 부부애에는 축복할 것이다. 그렇다고 쾌락에만 빠져들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강한 남편을 얻거나 처를 얻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것이다. 부부사이에도 서로 존중하고 삼가 할 것을 아는 것이 부부애를 오래 지속시키는 한 방법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충실한 자녀를 낳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자식을 잘 키우는 것 또한 가정의 신성한 즐거움이다. 부부는 자식을 낳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서로 기쁘게 살면서 사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도 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어머니이면서 자식을 제쳐놓고 사교에 몰두하며 쓸데없는 입방아로 세월을 까먹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면 칭찬할 일은 못된다. 훌륭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인생에서 무엇보다 아름다운 일인 것이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함은 아름다운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인생에 주어진 최고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이상적 견지에서 그렇고, 현실에서의 어머니는 이상적 어머니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의 도는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도 현명한 어머니와 우매한 어머니는 있다.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식을 기르는 방법에서 잘하고 못함이 있으며 보는 눈이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됐건 어머니의 사랑은 지상에서는 아름다운 것 중의하나다.
자식의 사랑도 못지않게 무한한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든가, 불안하다거나, 불행의 복병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거나, 해서 자식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한 것인가 불행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어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 것이 어딘가 거림직 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뒤바꿔서 생각하면 양친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데 대해서조차 감사하며 조금도 불행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양친에게 한 없이 감사하며 지낸다. 돌아가시면 신성하게 대할 것 같다. 결코 불평 같은 것도 안 한다. 자연은 이렇게 자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고통도 공포도 번민도 그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거부(拒否) 없이 받아들이며 느끼며 살면 그것으로 된다는 말이다.
돌덩어리라면 채이고 쪼개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라낸다 해도 아무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기쁨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면서 조금이라도 불안하지 않다면 부모를 원망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나는 자식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녀들도 그들이 태어난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식을 부모가 만들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자극하여서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맹목적으로 부모가 일하도록 했다고 불수도 있다. 그렇다고 어버이가 자식을 만든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참으로 묘한 데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신비, 자기가 태어난 우연성, 자녀가 태어나는 우연성, 등을 생각해 나간다면 실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 같다고 생각할 밖에 도리 없는 것으로 된다.
이것에 관해서는 따로 적은 것도 있어서 더 쓸 필요도 없다. 내가 태어난 것이 실로 몇 십만 분의 일, 아니 그 이상의 우연으로 태어났지만 내 부모도 그렇게 태어났다. 더하여 그리고 양친이 결혼한 것도 우연이다. 이렇듯 한 세대 앞서서 또 그에 앞서, 또 그에 앞서서, 이렇게 되돌아가서 인간이 생겨난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를 거듭하여 생각해 보면서, 그들 속의 난자나 정충들이 어떤 고장이 있었다고 한다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다. 곧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고 겹쳐져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겠고, 이것은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는 우연의 겹치기인 것이다, 롯도 복권에 당첨되기보다 어려운 우연의 기회가 무한히 이어져서 우리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사람도 상상되지 않는 일이다.
인간이 되고 나서부터도, 이웃한 정충이 난자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고 하면 나는 생겨나지 않았다.
이런 불가사의(不可思議)는 생각만 해도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태어나버린 나로서는 그런 것들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고, 어쨌거나 태어나도록 되어서 태어난 것 같은 당당한 얼굴을 하고 다닌다.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전신이 얼마나 많은가! 태어난 것이 업이라고 한다면 그 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단지 아는 게 있다면 나도 그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현재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비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마음에 담는다면 입방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하는 짓이 될 테니, 그냥 사람은 지어진 대로 살아 갈 밖에 방도가 없다.
태어난 것이 좋으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죽어버린다면 그만이다. 그냥 본래 대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사는 것이 본연이므로 그 숙명을 달게 받아서 그 숙명 속에서 진솔한 삶으로, 자연이 명하는 대로 사는 것이 슬기로운 것이다. 자연이 명한 대로라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다운 건강과 행복을 세상 사람들이 맛보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행복이란 내용도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금은 그저 얼버무려둘 뿐이다.
신의 뜻이라든가 하늘의 명한 대로라든가 하는 말이 보다 어울리지만, 신(神)이라든가 하늘같은 것의 말뜻을 풀어내야 하는 것이 까다롭다. 그렇게 이름 붙여도 좋은 자연의 의지에 순종하여 사람들이 행복해지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들이 인간으로 사는 동안 힘쓸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