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중요한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살면서 그저 자녀를 남겨 놓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인류는 생장(生長)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류가 생장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살아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그것은 자기를 완전하게 살리도록 노력할 것과 이웃을 위해서 힘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은 또 바르게 살아가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점점 개선하여 인류 전체가 인간다운 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을 명령받았다.
우리들 개인의 힘은 참으로 미약하다. 그러나 이런 적은 힘으로도 인류발전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멈추었을 때 그 사람은 다음 세대에 자리를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것이 반드시 좋다고 한정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을 조금이라도 품어 들이지 않고는 인류에게서 버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진보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도로를 좋게 한다든지 전답은 잘 만든다든지 하는 것이다. 잘 할 수 있으면 있는데 까지 좋게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 세상은 얼마든지 손길을 뻗어 잘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것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게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사는 보람을 느낄 수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해야 함을 알면서도 좋게 하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인류는 그런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내면에서는 힘이 점점 없어지고 활력도 없어지고 살 보람을 잃고 마는 것이다.
살 보람이란 구실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오는 실감(實感)이다. 정신적(精神的)으로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으로부터 부여 받은 감정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힘이 생기고 활발해진다. 기쁨을 느끼면서 스스로 힘이 솟는다. 이토록 기뻐지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왠지 모르지만 기쁨으로 힘이 생기고 생동감을 얻는다. 때로는 울적해지면서 눈물도 흘린다. 이는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작곡가는 감동으로 곡을 쓰고 연주가는 감동하여 또 그 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청중도 감동하는 것이다.
좋은 그림을 보아도 그렇다. 화가의 감동이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좋지 않은 곡이나 그림은 볼 뿐이고 내적 감동이 없다. 사람도 내면에 감동이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
정신력을 부정하고는 인생에서의 재미를 풀어낼 수가 없다.
정신력도 실은 생명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는 하지만, 육체는 개인적인 데 반해서 정신은 인류 전체의 건전한 발육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신을 건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인류전체가 바른 길로 들어서 생장(生長)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는 아니다. 그래서 정신적 기쁨을 온전하게 맛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은 공허한 마음을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서 속여 얼버무려든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이 의지에는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인생의의미를 뒤틀어서, 인생의 기쁨을 부자연스레, 병적인 것에서 얻으려고 점점 바른길에서 헤매면서 돌아가는 길을 잃는 것이다.
진정, 자연에서 오는 생명의 환희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건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건강한 육체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잊고서도 건전한 것처럼, 건전한 정신은 자기의 존재를 잊고서도 보다 건전한 무심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에 그 사람은 우주와 조화되는 것이다. 곧 산채로 진리 안에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도록 순수해 지는 것이다. 환희는 내 스스로에게서 용솟음치는 것이다. 그것은 자극적이지 않으며 차분한 영원에로의 동화(同化)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은 이런 기분을 이름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하늘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려면 스스로 자기를 승화하여 얻도록 해야 된다고 말하는데, 건전한 정신을 구하려면 모든 생명이 건전하게 돼야 하는 세상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건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무력함을 끊임없이 느끼면서, 자기의 노력부족을 생각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이 건전하게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그 목적을 향해서 정직하게 밟아 나아간다면, 아주 깊은 환희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보내주는 것이다.‘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우리는 할 일을 다 하였다.’ ‘땅위에서 두려울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고마울뿐이다.’, 이런 느낌을 그런 때에 얻을 것이다.
‘제 힘은 이것뿐입니다. 나머지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신이여!’
라는 기분이 될 것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 기쁨은 결코 인간의 멋대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지성(至誠)으로 움직여서 자기가 최선을 다할 때, 또는 마음이 진심으로 되었을 때, 신과 마음이 이어졌을 때, 자기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맑고 고요한 물이 달의 그림자를 비추는 것과 같다. 보다 깊은 수맥을 찾아 파내는 순간에 박자(拍子)를 놓치지 않고 맑은 물이 용솟음 처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이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정신은 이런 저런 것으로 동요하기 쉽기 때문에, 이런 깊은 즐거움, 무심(無心)의 즐거움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구원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아무리 구름이 덮여 있어도 태양이 있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돌아 갈 곳도 아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그늘을 말끔히 걷어내고 그 마음이 하고자하는 바를 행(行)한다면 영원한 즐거움의 샘에서 무한한 즐거움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비관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이 이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지성의 부족과, 자기사랑의 부족, 자기정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늘을 원망하는 심기(心氣)는 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