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은 개인적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앞서 말했다. 또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그렇게 동정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 나름이고, 고통을 돕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며,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무엇인가 돕고 싶은 때가 많다. 결코 인간은 다른 사람의 육체의 고통을 냉담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동정에는 정도가 있음을 앞서 말했다. 이를 여기서 잠깐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고민을 가만히 볼 수가 없다. 그 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병을 낫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기는 것은 자기 힘으로 나을 정도의 부상이나 병이면 좋지만, 그런 정도를 벗어난 부상이나 병인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다.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는 이’는 이런 때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여 고칠 수 있도록 사람을 만들었다. 이점에는 빈틈이 없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정도다. 다른 이의 육체적 고통을 낫게 할 수 없는 사람은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의사를 부르러 간다든가 의원(醫院)으로 메어다 놓는다든지 가족에게 알린다든지, 하는 것은 이런 사람도 될 것이다. 냉정하게 지나치면서 조금도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 언짢고 귀찮아서 못 본체하면서 스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자칫 무엇인가 연루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못 본체하며 지나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렇게 아픈 사람을 보고 안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정인 것이다. 이런 인정어린 사람도 만들었다. 다만 때때로 반동적으로 잘 됐다고 여기는 병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관심이라고 하기보다는 관심이 강한 나머지 그에게 지는 것이 싫어서 오히려 나와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심약한 사람이 오히려 참혹한 짓을 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그는 동정심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순정적인 동정심에 반항적으로 되지 않으면 싫은 생각과 지금 이 시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 반감을 일으킨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거나 즐기기까지 하는 것은 반 이정적인 불쾌한 감마저 우리들에게 일으킨다. 그에 반해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고 그를 돕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눈물지도록 고맙게 여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부상이나 병을 낫게 할 힘도 없으면서 단지 동정심만을 팔면서 떠들어대는 사람은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밉게 보일 뿐이다. 쓸데없이 말로만 그치며 상대를 점점 나쁘게 만드는 사람은 답답하고 노기(怒氣)마저 인다. 그래서 동정심이 훌륭하다고 하기 보다는 상대의 병을 낫게 하는 것만이 훌륭한 것이다. 순정적으로 그냥 떠들기만 하면, 그 것이 순수하다면 미워할 이유가 없고, 동정이 가서 아름다운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역시 그 결과는 해가 있을 뿐이고, 결과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답답하기도 하고 역겨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부상이나 병을 동정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그러나 그 것을 낫게 할 수 없을 때는 그 미덕이 억지 놀음 같아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육체의 건전함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낫게 하는 힘은 다른 사람에게도 있으므로 그것을 낫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걱정하고 그것 때문에 애쓰는 이가 있으니 그들의 행위가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미덕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을 그 사람에게 맡겨서 자기 일에 충실하도록 함이 옳은 것이다.
다만 앞서 말했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면서 오로지 자기의 선심 을 드러내려고 하는 짓은 야만적이고 또 불쾌한 이야기다. 약한 사람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에 비겁한 짓이 된다. 또 자연의 약점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는 것이 됨으로 또한 졸렬한 짓이 된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면 사람답지 못하다.
문명인이 되면 될수록 이런 것에 노기가 일 것이다. 병적인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능히 일어날 수 있으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사람들을 병적으로 만들기 쉽고 또 인류운명의 올바른 발전에 해가되기 때문에 경계해야한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