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쾌락의 노예가 되기 쉽다. 하지만 이 쾌락을 인간에게 준데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을 느끼는 것이 선천적이라면 쾌락을 느끼는 것 또한 선천적이므로, 우리가 느끼려고 해서 느끼는 것이 아니고 느끼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正當)한 쾌락을 맛보려면 자연의 의지(意志)에 걸맞게 해야 한다. 자연은 사람의 쾌락과 기쁨을 이끌어가므로 인간이 그 즐거움과 쾌락한 생활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쾌락은 인간이 이를 맛보도록 하기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쾌락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교활(狡猾)하므로 정당한 대가를 치르며 쾌락을 즐기는 것이 귀찮아 인공적(人工的)으로 훔쳐 가지려고 한다. 그 결과로 쾌락이 부자연스럽게 되고 과도(過度)화 되면서 병적으로 된다. 그래서잘못되면 죄악으로까지 이른다.
정당한 쾌락은 아름다운 것이고 존중해야 하지만 훔쳐서 하는 쾌락은 해를 입을 때가 많다. 이 구별을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한 데, 이것을 모르면 쾌락을 모두 죄악이라고 생각하거나 쾌락주의로 빠질 수 있다.쾌락은 목적이 아니고 목적을 수행하기위해 주어진 보수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유혹으로 얻고 함정으로 얻기도 하는 데, 건전한 쾌락은 보다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쾌락만을 위주로 한 생활을 하면 벌을 받기 쉽다. 인생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성실하고 진지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쾌락이 있는 것이다. 단지 그때그때 일한 보상으로써 쾌락을 허용하는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을 먹는 즐거움은 얻을 수 없다.
미각(味覺)의 즐거움만을 얻기 위해서 배부른 것조차 불평한다면 자연이 준 쾌감을 남용하는 것이다.
또한 남녀 간의 관계에서도, 특히 이런 쾌락이 남용되기 쉽다. 쾌락이 주(主)가아니고, 성욕인 경우의 주(主)되는 목적은 좋은 자녀를 두는데 있다.
또 많은 사람이 축제를 지내며 즐기는 것도 무엇인가 축하하기위한 것이 있어서 즐거운 것이지 그냥 이유도 없이 시끄럽게만 하다면 그 사회는 태만해지고 쇠잔(衰殘)해질 것이다. 쾌락을 바보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건전한 쾌락은 존중되고 장려되어야 하므로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을 즐겁게 하는 축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허나 괘락을 너무 찾아서 바른 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얽혀서 아무 부담 없이 즐기는 것도 일 년에 한번이나 두 번 쯤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인간이 바른 일을 행한 위로의 목적으로 하는 데 있는 것이지, 매일 매일을 허송세월하며 세월 죽이기로만 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은 아니다.
쾌락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한심스럽다. 중요한 것은 힘을 얻기 위해서 하는 쾌락이니 묵묵히 착실하게 일하여야 한다. 이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쾌락을 과도하게 찾아 헤매는 사람은 마침내 병적인 사람으로 될 것이다.
하지만쾌락 그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사람에게 쾌락을 허락한 자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곧 그 감사의 길을 찾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갑자기 벌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한편 쾌락을 죄악이라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 무리에 함께 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