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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孤獨)에 대해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전율하게 한다.’-파스칼-

 

고독이 무서운 것은 고독 그것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고독의 조건에 의한 것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음 그것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죽음의 조건으로 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고독의 조건 말고 고독 그 자 체가 있는 것일까! 죽음의 조건 외에 죽음 그 자체가 있는 것일까! 그 조건 이외에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것, -죽음도, 고독도, 진실로 이런 것이리라 생각된다. 더욱이 실체성(實體性)이 없는 것은 실재성(實在性)이 없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고대 철학은 실체(實體)성이 없는 실재(實在)성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죽음도, 그리고 고독도, 마치 어둠(闇)은 빛의 결핍(缺乏)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단지 결핍(缺乏)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인은 조건(條件)에 의해서 사고(思考)한다. 조건에 의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은 근대과학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근대과학은 죽음의 공포나 고독의 공포의 허망성(虛妄性)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재성(實在性)을 드러내 놓았다.

 

 

   고독(孤獨)이란 것은 ‘홀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독거(獨居)는 고독의 한 조건에 불과하다. 더욱이 외적(外的)인 조건인 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고독에서 도망(逃亡)하려고 혼자 사는 이 조차 있다. 은둔(隱遁)자라고 하는 이는 가끔 이런 이들이다.

 

 

   고독은 산(山)중에 있지 않다. 고독은 거리에 있다. 하나의 인간에게 있지 않고 큰 무리의 인간 속에 있는 것이다. 고독은 사이<간(間)>에 있음으로 해서 공간과 같은 것이다. ‘진공의(眞空)공포’-그것은 물질의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것이다.

 

 

   고독을 내 안에 가두어두지 말라. 고독을 느낄 때 마음속으로 자기 팔을 쭉 뻗고 뚫어지게 보아라. 고독감(孤獨感)은 곧 조여지리라.

 

 

   고독을 맛보기 위해서, 서구사람이라면 거리에 나갈 것이다. 하지만 동양 사람은 자연(自然) 속에 들어갔다. 그들에겐 자연이 사회와 같았다. 동양인에게 사회의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겐 인간과 자연이 대립적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동양인의 세계는 희미한 세상이다. 하지만 서양인의 세계는 한낮의 세상과 한밤의 세상인 것이다. 낮과 밤의 대립이 없는 곳이 희맑음이다. 희맑게 쓸쓸함은 한 낮의 쓸쓸함이나 한밤의 쓸쓸함과는 성질이 다르다.

 

 

   고독(孤獨)에는 미적(美的)인 유혹(誘惑)이 있다. 고독에도 맛이 있다. 혹시 누가 고독을 즐긴다면 이 맛 때문일 것이다. 고독의 미적인 유혹은 여자들도 알고 있다. 고독(孤獨)의 높은 윤리적(倫理的) 의의(意義)에 도달(到達)하는 것이 문제(門題)일 것이다.

 

 

   그의 일생이 고독의 윤리적(倫理的)의의(意義)의 탐구였다고 하는 키에르케골<Aabye Kierkegaard (1813.5.5-1855.11.11. Denmark) '現代 實存思想의 선구적 사상가, 철학자’라는 사회적 통칭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종교적 저작자 또는 '그리스도교적 저작자로 자처>조차 그 미적(美的)인 유혹(誘惑)에 이따금 말려들었다.

 

 

   감정(感情)은 주관적(主觀的)이고 지성(知性)은 객관적(客觀的)이라고 하는 보통(普通)의 견해(見解)에는 오류(誤謬)가 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보다 진리에 가깝다. 감정은 많은 경우에 객관적이고 사회화(社會化)된 것이지만, 지성이야말로 주관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참 주관적인 감정은 지성적인 것이다. 고독은 감정이 아니고 지성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眞理)와 객관성(客觀性), 이에 따른 비인격성(非人格性)과를 동일시(同一視)하는 철학적(哲學的) 견해(見解)만큼 유해(有害)한 것은 없다. 이런 견해는 진리(眞理)의 내면성(內面性)뿐 아니라, 더하여 그의 표현성(表現性)을 이해하지 않고 있다.

 

 

   어떤 대상(對象)이라도 나로 하여금 고독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는 없다. 고독에서, 나는 대상(對象)의 세계(世界)를 전체로 하여 뛰어 넘는 것이다.

 

 

   우리가 고독할 때 물질로 해서 그 고독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물질로 해서 무너지는 것은 고독을 모르는 때이다.

 

 

   물질(物質)이 참(眞) 표현적(表現的)인 것으로써 우리를 죄는 것은 고독(孤獨)에서다. 그래서 우리가 고독(孤獨)을 이기게 되는 것은 그 손짓에 응하는 자기의 표현활동(表現活動)인 것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고대 로마 말기의 기독교의 초대 교부(敎父)·신학자(354-430). ‘신국론(神國論)’‘고백’ 등을 저술함>는 식물(植物)은 인간(人間)에게 보이기를 바라고, 눈에 띤 것이 그 식물의 구제(救濟)라고 했지만, 표현(表現)한다는 것은 사물(事物)을 구(救)하는 것이고, 사물(事物)을 구(救구원)함에 따라서 자기(自己)를 구(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독(孤獨)은 보다 깊은 사랑의 뿌리를 내는 것이다. 거기에 고독(孤獨)의 실재성(實在性)이 있다. //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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