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은 나면서부터 거짓말쟁이’라고 라ㆍ부류엘 은 말했다. “진리는 단순한데 인간은 별나게 치장하기를 좋아한다. 진리는 인간에 속하지 않고, 진리는 이른바 그대로 돼 있어서 그 모든 완전성(完全性)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 거짓 법어(法語)만을 즐긴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은 허영(虛榮)이 그의 존재의 일반적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화려하게 치장하기를 좋아 한다. 허영(虛榮)을 그 실체(實體)에 쫓아 말하자면 허무(虛無)인 것이다. 해서 인간은 거짓이나 법어(法語)를 만드는 것이며 이러한 자기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는 인간의 일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되어 있고, 그 모든 완전성(完全性)에서 인간과는 관계없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이다.
이런 본성(本性)에서 보면 허영(虛榮)적인 인간은 위선(僞善)적인 것이다. 진리(眞理)라는 것에 따로 선(善)이 있지 않는 것처럼 허영(虛榮)과는 별도(別途)로 위선(僞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善)이 진리의 하나라고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위선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가 있다. 허영이 인생에서 약간의 효용(效用)을 갖는 것처럼 위선도 인생에서 약간의 효용이 있다. 위선이 허영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위선에 대해서 반감(反感)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의 허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위선(僞善)에 대해서, 위악(僞惡)이라고 하는 묘한 말조차 생기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위악(僞惡)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인간의 믿을 수 없는 분명한 허영이지 않는가! 이것은 위선이 허영에 다름 아니란 것을 또 다른 측면으로 명료(明瞭)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악가(僞惡家)의 특징은 감상적(感傷的)이란 것이다. 일직 우리는 위악가로 불리는 사람치고 감상가(感傷家)가 아닌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위선에 반감을 갖는 그는 모랄(morale:근로의욕)도 센티멘탈이슴(sentimentalism:감정적 경향)일 밖에 없다. 위악가(僞惡家)는 아무튼 자기가 상상(想像)하는 것처럼 깊이 있는 인간은 아니다. 이런 그들의 상상(想像)은 또 하나의 쎈치멘탈리슴에 속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무해(無害)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감상적인 인간이 깊이는 없지만 무해(無害)하다고 하는데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서만이 위선적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위선은 허영인고로 허영의 실체는 허무인 것이다. 그래서 허무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모든 덕(德)이 본래 자기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악덕도 또한 본래는 자기에게 속한 것이다. 이런 자기를 잊고 단지 다른 사람, 사회(社會)마저 상대로 생각하는데서 위선자라는 것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의 사회성이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이 역설(力說)되고 있는 이래로, 얼마나 많은 위선자가 생겼는가! 또 오히려 도덕(道德)의 사회성(社會性)이라고 하는 것 같은 이론은 현대의 특징적인 위선을 감싸기 위한 것까지 풀어내는 것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를 위선적(僞善的)이지 않다고 할 것인가! 허영(虛榮)은 인간존재의 일반적 성질이다. 위선자가 두려운 것은 그가 위선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의식적(意識的)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의식(意識)하고 있는 것은 자기(自己)도 아니고, 허무(虛無)도 아니고, 그저 다른 사람과 사회(社會)라고 하는 것이다.
허무(虛無)에 뿌리박은 인생은 픽셔널<fictional 허구적. 사실에 의거하지 않음.>인 것이다. 인간의 도덕(道德)도 또한 픽셔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선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약간의 효용(效用)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픽셔널한 것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 실재성(實在性)이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은 이 증명에 성의(誠意)와 열정(熱情)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인생을 증명한다는 것은 형성(形成)하는 것이고 형성한다고 하는 것은 내부(內部)와 외부(外部)가 하나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위선자에게는 내부와 외부가 따로따로인 것이다. 위선자(僞善者)에게는 창조(創造)라는 것이 없다.
허언(虛言)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표현이 진리로써 받아들이는 성질을 그 자신도 갖고 있기 위해서다. 사물(事物)은 표현(表現)됨으로써 우리에게 무관심(無關心)해진다. 표현이란 것은 이렇게 두려운 것이다. 사랑을 하는 연인(戀人)은 언어(言語)라는 것, 표현(表現)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몸서리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되는 저작자(著作者)가 표현(表現)의 두려움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여 의식(意識)하고 있는 위선자(僞善者)가 아첨적(阿諂的)이지 않는 일은 드물 것이다. 위선이 다른 사람을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위선 그것이기보다는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첨(阿諂)에 의한 것이다. 위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은 아첨(阿諂)을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데 있을 것이다. 사람에 아부하는 것은 틀린 것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 아부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패시키지는 않지만 아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패시키고, 그 마음을 속여서, 진리(眞理)의 인식(認識)에 대해서 무능력(無能力)하게 만드는 것이다. 거짓말쟁이조차도 아첨하는 것보다도 도덕적(道德的)으로는 낫다. 거짓말의 해로움조차도 주(主)로 그 속에 섞여있는 아첨에 의한 것이다. 진리(眞理)는 단순(單純)하고 솔직(率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는 천(千)가지의 모습(模襲)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위선(僞善)이 아첨(阿諂)하기 위해서 취하는 자태(姿態) 또한 무한(無限)하다.
작거나 크거나 권력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갖출 보다 필요한 덕은 아부하는 사람과 순진한 사람을 한 눈으로 가려내는 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만약 그가 이런 덕을 갖추고 있다면 다른 모든 덕을 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행을 감추는 사람은 선하게 산다.” 는 말에는 생활 속의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다. 감춘다고 하는 것은 위선(僞善)도 위악(僞惡)도 아니다. 그냥 자연그대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감추며 산다고 할 정도로 사는 삶이, 세상이 허영이(虛榮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꿰뚫어 보는 삶이라고 할 것이다.
현대의 도덕적 퇴폐(道德的頹廢)에서 특징적(特徵的)인 것은 위선(僞善)이 그 퇴폐(頹廢)의 보편적(普遍的)인 형식(形式)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퇴폐의 새로운 형식인 것이다. 퇴폐라는 것은 보통의 틀이 무너지는 것이지만 이런 경우도 표면적(表面的) 틀은 진실로 잘 정리정돈 되어있다. 그래서 그 틀은 결코 낡은 것이 아니고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까지 된다. 더구나 그 틀의 깊숙한 곳에는 아무런 생명조차 없는, 틀이란 것이 있어도 마음은 그 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虛無)인 것이다. 이것이 현대(現代)의 허무주의(虛無主義)의 성격(性格)인 것이다.// 미끼기요시/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