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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인간조건에 대하여


   어떤 방법이라도 좋다. 나에게 집중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내가 무엇인가모를 그 위에 그냥 떠 있는 것을 느낀다. 대체 무엇 위에 떠 있는 것일까? 허무(虛無)의 위라고 할 밖에 없다. 나는 허무 속의 하나의 점(占)인 것이다. 이 점은 한없이 축소(縮小)할 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작게 되어도 내가 그 안에 떠있는 허무와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생명은 허무가 아니라 허무는 오히려 인간의 조건(條件)인 것이다. 허지만 이 조건은 마치 한 채의 파도, 한 방울의 물방울조차도 바다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듯이 그 무엇 없이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은 물거품 같다는 사상(思想)은 그 물거품의 조건으로써의 파도, 그리고 바다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잘 못된 것이다. 또 물거품이나 파도가 바다와 하나인 것처럼 사람도 그 조건인 허무와 하나인 것이다. 생명이란 허무를 끌어 모은 힘인 것이다. 그것은 허무(虛無)로부터의 형성력(形成力)인 것이다. 허무를 끌어 모아 만들어진 것은 허무가 아니다. 허무와 인간이란 죽음(死)과 나음(生)처럼 다르다. 그러나 허무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또 달리 인간의 조건으로서는 무수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방 이 책상 이 책 혹은 이 책으로 인한 지식, 또 이 집의 정원 그리고 둘러싼 전체의 자연 혹은 가족, 그리고 전체 사회 ... 세계. 이렇게 몇 마디 말로 나타난 것에는 다시 무수한 요소(要素)로 분해(分解)할 수 가 있다. 이런 무수(無數)한 요소(要素)들은 서로 관계 지어져있다. 또 인간이란 것도 그 신체도, 그 정신도, 이런 요소와 같은 질서(秩序)위에서 한없이 분해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의 세포(細胞)에 대해서 다른 모든 세포의 조건으로서, 하나의 심상(心象:감각기관의 자극 없이 의식 속에 떠오르는 인상)은 다른 모든 심상의 조것인 것이다. 이 조건들은 다른 모든 조건들과 관계되어 있다. 이렇게 어디까지든 분해해 나가게 되면, 조건(條件) 이외(以外)로의 무엇인가로 인간 그 자체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내가 세상(世上)의 요소(要素)와 같은 요소로 분해돼버리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상과 다른 어떤 것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과 인간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다른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물질(物質)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허무에서 처음으로 그런 물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의해서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 - 이것을 무한(無限)한 크기로 생각하건, 무한이 작게 생각하건, - 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면 허무(虛無)는 그 아프리오리<(라틴어)a priori선험적(先驗的)’ ‘선천적(先天的)’의 뜻을 나타내는 논리적 개념>인 것이다. 허무라고 하는 인간의 근본적 조건에 제약(制約)된다고 하는 것으로써 그 스스로가 허무로 돌아가는, 아니, 허무라고 하는 것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과 같은 요소에, 그 요소와의 관계에 한없이 분해되어진다고 해도 인간과 세상 사이에, 인간과 인간의 조건사이에 어디까지나 구별이 있는 것이다. 허무(虛無)가 인간조건(人間條件)의 조건(條件)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이 세계(世界)의 요소(要素)와 근본적(根本的)으로 구별(區別)되는 어떤 것이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무가 인간의 조건 또는 인간의 조건이 되는 어떤 것의 조건이기 때문에, 인생(人生)이 형성(形成)된다고 하는 것이 이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형성력(形成力)이고, 인간도 형성되어졌다고 하는 것뿐 아니라, 세계(세상)도 형성되었다고 하여야 비로써 인간생명에 대해서 현실적(現實的)인 환경(環境)의 의미(意味)를 갖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 꼴(형形)이 되어 밖으로도 꼴을 갖추고 사물(事物)에 꼴을 줌으로 해서 자기의 꼴을 만들어 간다. 이런 형성은 인간의 조건이 허무라고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세계(世界)는 요소(要素)에 분해(分解)되고 인간(人間)도 이 요소(要素)적 세계(世界) 속으로 분해되고, 그렇게 해서 요소와 요소와의 관계는 얼마간의 법칙에 의해 정식(定式)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에서는 생명이 성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추상적인 법칙이 아니고, 단순한 관계도, 관계의 더함(가加)도, 관계의 쌓임(적積)도 아닌, 생명은 틀(형形)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세계에서는 꼴<형(形)>이란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성(形成)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즉 허무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성(形成)은 언제나 허무(虛無)에서의 형성인 것이다. 꼴의 성립도, 꼴과 꼴의 관계도, 꼴에서 꼴로의 변화도, 그저 허무(虛無)를 근저(根柢)로 하여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꼴이란 것의 본질적인 특징이 있는 것이다.

 

   고대에는 실체(實體)개념(槪念)에 의해서 사고(思考)했는데, 근대에는 관계(關係)개념 또는 기능(機能)개념<함수(函數)개념>에 의해서 사고(思考)한다. 새로운 사고는 꼴(형形)로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안 된다. 꼴은 단순한 실체가 아니고 단순한 관계내지 기능(機能)도 아니다. 꼴은 말하자면 양자의종합인 것이다. 관계개념과 실체개념이 하나로서, 실체개념과 기능개념이 하나임으로 해서 꼴(형形)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전의 인간은 한정된 세계 속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끝에서 끝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이 쓰는 도구는 어디에 사는 어떤 사람이 만들었고 그 기량은 어느 정도인 것도 알 수가 있었다. 또 그가 얻은 소식이나 지식이란 것도 어디에 사는 누구 입에서 나온 것이란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느 정도의 신용이 있는 남자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그의 생활조건, 그이 환경이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에 따른 꼴도 보이는 것이기에, 인간 자신도 그의 정신에서도, 그 표정에서도, 그의 풍모(風貌)에서도, 확실한 꼴(틀)이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전의 인간은 성격(性格)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의 조건은 달라졌다. 현대인은 무한정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쓰는 도구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가 없고,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서의 정보나 지식도 어디의 누구에 의해서 나왔는지를 알 수가 없다. 모두가 무명(無名)<익명(匿名)>인 것뿐만이 아니고, 모든 것이 무정형(無定形)인 것이다. 이런 생활조건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 역시 무명이여서 무정형(無定形)으로 되고 무성격(無性格)인 사람으로 되었다.

 

   현대인의 세계가 이렇게 무한정(無限定)하게 된 것은, 실은 그것들이 보다 한정되어진 결과로써 된 것이다. 오늘날은 교통의 발달에 의해서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서로 관계되어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수없는 것들에 매여져있다. 고립되었던 것은 수없이 많은 관계(關係)로 끌려 들어감으로써 지극히 용이하게 한정된 것으로 되었다. 실체적(實體的)인 것은 관계에 분해됨으로써 보다 엄밀(嚴密)하게 한정(限定)되어졌다. 이 한정지어진 세계에 대해서 이전의 세상이 오히려 무한정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는 무한정한 것이다. 관계(關係)적 내지 함수(函數)적인 것에는 한정되었다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게 한정되어진 결과로 꼴(형形)로서는 오히려 무한정(無限定)한 것으로 되었다. 이 무한정(無限定)이 실은 특정(特定)한 한정(限定)의 방식으로 발달한 결과로 생겨나게된데서 현대인의 무성격(無性格)이라고 일컬어지는특수한 복잡(複雜)성이 생겨났다.

 

   오늘날의 인간의 최대문제는 이런 꼴이 없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꼴을 만들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재적(內在的)인 입장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무정형(無定形)한 상태는 한정(限定)의 발달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의 모든 초월적(超越的)인 생각의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다. 형성은 허무에서의 형성, 과학을 뛰어넘은 예술적이라고 할 만큼의 형성(形成)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가지 예술적인 세계관, 더욱이 관조적(觀照的)이 아니고 형성적(形成的)인 세계관(世界觀)이 지배적(支配的)으로 되기까지는 현대에서는 구제(救濟)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혼란(混亂)이란 것도 모든 것이 혼합(混合)되어 있다. 대립(對立)하는 것들이 종합(綜合)되어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대립하는 것이 혼합(混合)되어간다고 하는 것이 실제에 가깝다. 이 혼합에서 새로운 꼴이 나올 것이다. 꼴(형形)의 생성은 종합의 변증법보다 혼합의 변증법인 것이다. 나(我)의 구상력(構想力)의 논리(論理)는 혼합(混合)의 변증법(辨證法)으로써 특징(特徵)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혼합(混合)은 부정(不定)한 것들의 결합(結合)으로써 그 부정(不定)한 것들의 부정성(不定性)의 근거(根據)는 허무(虛無)의 존재(存在)인 것이다. 모든 것은 허무(虛無)에 있다. 단지 따로따로의 특수적(特殊的)인 존재(存在)를 갖는다. 혼합(混合)의 변증법(辨證法)은 허무(虛無)에서의 형성(形成)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혼돈(카오스:Khaos)에서 우주(코스모스:Cosmos)에로의 생성(生成)을 설명(說明)한 고대(古代)인의 철학(哲學)에는 깊은 진리(眞理)가 들어있다. 중요한 것은 이 의미를 어디까지나 주체적(主體的)으로 파악(把握)하느냐 하는 것이다.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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