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서 거의가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요사이 새로 나온 윤리학 책, 대충 우리나라에서 쓰인 윤리적인 문제를 다룬 책을 펴보세요. 거기 어디에도 행복의 문제를 다루지 않은 책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책을 윤리 책이라고 믿어도 좋은 것인가? 그 책의 저자조차 윤리학자라고 믿어도 좋은지 어떤지. 나는 모르겠다.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것은 지난날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언제나 행복이 윤리의 중심문제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고전적인 윤리학이 그랬었고, 스토아(Stoic school)의 엄숙(嚴肅)주의조차도 행복이란 것 때문에 절욕(節慾)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아우그스디뉴스나 파스칼등은 인간은 어디까지나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여 그들의 종교론이나 윤리학을 정립했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에 있어서 윤리의 혼란은 여려 가지로 논하고 있지만 윤리의 책에서 행복(幸福)론이 없어졌다는 것이 이런 혼란을 대표하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새로운 행복론이 설정될 때 까지는 윤리의 혼란은 구(救)하여지지 못할 것이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무섭고 커다란 불행의 징조(徵兆)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건전한 위장(胃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위(胃)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같이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들은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시대 사람들은 행복을 생각할 기력조차 없도록 불행하다는 말인가? 행복을 이야기 하는 것이 무언가 부도덕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세상에는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가운데 행복을 모르는 사람에게 불행의 무엇인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오늘의 우리도 어떤 경우에서 말하자면 본능적인 행복을 구하고 있는 것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을 자의식(自意識)이 넘쳐나서 고통 받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극단의 자의식(自意識)적인 사람이 행복에 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 정신적 상황의 성격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을 특징(特徵)짓는다.
양심의 의무와 행복의 요구를 대립적(對立的)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대적 엄숙주의<嚴肅主義rigorism>사고다. 여기에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오늘날의 양심이란 행복의 요구에 다름 아니다. 라고. 사회·계급·인류·등등, 어떻게 붙여지건 간에 인간저인 행복의 요구가 말살되려고 할 때 행복의 요구만큼 양심적인 것이 있겠는가? 행복의 추구와 이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윤리적 개념처럼 단절되어 간다면, 사회·계급·인류·등은 어떤 윤리적인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또한 윤리의 문제가 행복의 문제로부터 분리됨으로서 모든 임의(任意)의 것들을 윤리의 개념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행복의 추구가 오늘의 양심으로써 복권(復權)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humanist)인가 아닌가는 주로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다.
행복의 문제가 윤리의 문제에서 말살(抹殺)됨에 따라서 많은 윤리적 빈 말(空語)이 생겼다. 예를 들면 윤리적(倫理的)이라고 하는 것과 주체적(主體的)이라 고하는 것이 함께 논하여지는 것은 다르다고 하겠다. 하지만 주체적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날은 행복의 추구에서 추상적(抽象的)으로 되어 짐에 따라서 하나의 윤리적으로는 빈말로 된다. 여기까지다. 현대의 윤리학에서 말살되려고 하는 것은 동기론(動機論)여서 주체적(主體的)이라는 말의 유행(流行)과 함께 윤리학은 되레 객관(客觀)론에 빠져들게 되었다. 행복의 추구가 모든 행위의 동기(動機)라고 하는 것은 이전의 윤리학의 공통의 출발점이었다. 현대의 철학은 이런 사고(思考)를 심리주의(心理主義)라고 이름 붙여서 배척(排斥)하는 것을 배웠지만 그 때에 한 편에서는 현대인의 심리의 무질서가 시작되었다. 이 무질서는 자기 행위의 동기가 행복의 추구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와 함께 심리의 리얼리티<reality현실. 현실성. 현실감>가 의심스러워졌고 인간을 살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종류의 관념주의(觀念主義)가 생겨났다. 심리의 리얼리티는 심리 안에서 질서가 있을 때 분명해진다. 행복의 추구는 그 질서의 밑바탕이다. 심리의 리얼리티는 행복추구의 사실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행복 론을 말살(抹殺)한 윤리는 얼핏 보아 아무리 윤리적이라고 하드래도 그 내실(內實)에 있어서는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다름 아니다.
이전의 심리학은 심리 비평의 학문이었다. 그것은 예술비평처럼 비평의 의미에 두는 심리비평을 목적으로 했었다. 인간정신의 여러 가지 활동, 여러 가지 측면을 비평하는 데 있어 이것을 질서 있게 하는 것이 심리학의 할 일이었다. 이 일에 있어서 철학자와 문학자는 한통이었다. 이렇게 된 가치비평이라고 하는 심리학이 자연 과학적 방법에 뿌리 둔 심리학에 의해서 파괴돼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을 때에 이에 반항해서 나타난 것이 인간학(人間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학도 오늘에는 최초의 동기에서 일탈(逸脫)하여 인간 심리의 비평이라고 하는 고유의 의미를 포기하고 여러 가지 임의(任意)의 것들이 인간학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철학에 있는 예술가적인 것조차 잃고 말았으니, 심리 비평의 일은 그저 문학자에게만이 맡기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심리학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된 오늘날의 철학의 추상성(抽象性)이 있다. 이제라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이 현대철학의 한 가지 특징이 행복론의 말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행복을 거저 감성적(感性的)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릇 주지주의(主知主義)가 윤리상 행복론과 마주 이어지게 하는 것이 늘 있었음을 사상(思想)의 역사는 밝히고 있다. 행복의 문제는 주지주의(主知主義)에서 최대의 지주(支柱)라고 할 수 있다고 조차 말 할 수가 있겠다. 만약 행복론을 말살하고서도 걸쳐있으려면 주지주의를 조여 죽이는 것은 쉬울 것이다. 실제 오늘이 반주지주이의 사상의 거의는 이렇게 행복론을 말살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반 주지주이의 비밀이 있다.
행복은 덕(德)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 그것이 덕(德)인 것이다. 물론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 자기가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나은, 더 낳은 것을 행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해진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들은 행복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일상의 자잘한 일에서 즐겨 자기를 희생하기에 이르기까지, 또한 어떤 상황에 있어서건, 행복은 그 힘이 된다. 덕(德)이 힘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을 그 어떤 것(말)보다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죽음이 관념(觀念)이라고 나는 썼다. 그러면 삶은 무엇인가? 삶이란 상상(想像)이라고 하고 싶다. 어떻게 삶의 현실성을 주장하는 이라도, 뒤집어서 이것을 죽음과 대비할 때에는 삶이 왜 상상적(想像的)인 것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상상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되레 현실적인 것이 상상적인 것이다. 현실은 내가 말하는 구상(構想)력-상상력(想像力)-의 논리에 따르게 된다. 인생은 꿈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느끼지 않았을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실감(實感)이다. 그 실감의 근거가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꿈이나 공상적(空想的)인 것의 현실성이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증명을 하는 이는 구상(構想)력의 형성(形成)작용이 된다. 삶이 상상적이라고 하는 의미를 두면 행복도 상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일반적인 것으로 하여 이해하는 데는 죽음에서부터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은 원래 구체적인 것이다. 허나 이렇게 온전히 구체적인 죽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것이다. “사람은 오직 홀로 죽는 것이다”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각자가 따로따로 죽어간다. 하지만 그 죽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것이다. 원조(元祖)아담이란 사상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죽음이 있는 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반성(一般性)이야말로 우리를 곤혹(困惑)하게 하고 있다. 죽음은 그 일반성(一般性)에서 인간을 가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 죽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맞아 고독한 것이다. 내가 살아남아 그대가 홀로 죽어 간다고 하드래도, 혹 그대의 죽음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대의 죽음에서 고독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늘 특수적(特殊的)인 것이다. 일반적인 죽음이 분리(分離)하는데 반해서 특수적인 삶은 결합(結合)한다. 죽음이 일반적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관념(觀念)이라고 생각함에서 삶은 특수적이란 의미에서, 상상(想像)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특수적인 것 밖에 즐기지 않는다. 예술가는 본성적(本性的)으로 다신론(多神論)자다. 원래 인간은 특수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일반성은 죽음을 맞이하는 일반성과는 다르다. 죽음의 일반성이 관념을 갖는 일반성에 속한다고 하면 생(生)의 일반성은 상상력에 관계된다고 하는 타입의 일반성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개성이란 별도의 타입인 것이 아니라 타입이 개성인 것이다. 죽음이란 것에는 타입이 없다. 죽음의 타입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더욱 생(生)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성은 다양성의 통일이지만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것을 통일 시키고 하나의 틀을 만드는 것이 구상력에 다름 아니다. 감성(感性)에서도 지성(知性)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개성(個性)은 구상(構想)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과 같이 행복이 상상(想像)이라는 것은 개성(個性)이 행복(幸福)이라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자연은 그 발전단계로 올라감에 따라서 점점 많은 개성을 분화(分化)한다. 그것은 어둠에서 빛을 구(求)하고 창조(創造)하는 자연(自然)의 근원적(根源的)인 욕구(欲求)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인격은 땅이 낳은 것 중에서 최고의 행복이라고 하는 궤데(Goethe, Johann Wolfgang von)의 말만큼 행복에 관해서 완전한 정의(正義)는 없다. 행복해지려는 것은 인격을 갖춘다는 것이 된다.
행복이 육체적 쾌락에 있는가 아니면 정신적 쾌락에 있는가? 활동에 기인하는가, 존재에 기인하는가와 같은 물음은 우리를 그저 분규(紛糾)로 끌어드리기만 한다. 그런 문제에는 이미 그렇게 문제로 제기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은 육체이면서 정신이고, 활동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인격으로 형성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행복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인격이 분해(分解)되는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은 역으로 행복이 인격이라고 하는 명제를 이른바 세계사적(世界史的) 규모(規模)로 놓고 증명하는 것이다.
행복은 인격이다. 사람이 외투를 벗어 던져버리듯 걱정 없이 다른 행복은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보다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그가 이것을 버리고 사라지지 않고, 버리고 사라질 수도 없다. 그의 행복은 그의 생명과 같이 그 자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행복을 가지고 그는 이런저런 곤란(困難)과 싸우는 것이다. 행복을 무기로 삼아 싸우는 사람만이 쓰러지더라도 더욱 행복하다.
겸손함, 정중함, 친절함, 관대함 등등. 행복은 늘 밖으로 나타난다. 읊지 않는 시인(詩人)이란 진정한 시인이 아닌 것처럼 단지 내면적(內面的)이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표현적(表現的)인 것이다. 새가 지저기는 것처럼 내 스스로 밖으로 드러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자인 것이다.//미끼기요시/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