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신체로써 알 수 있다. 우리는 움직이면서도 기뻐할 수가 있다. 또 즐기면서도 운동은 활발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움직이면서 성(怒)낼 수가 있다. 성(怒)은 우리의 운동을 격렬하게도 하게 한다. 그런데 감상(感傷)할 경우에는 멈추어 서게 된다. 이 경우 적어도 정지(靜止)에 가까운 상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움직이자마자 감상(感傷)을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바뀌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을 감상(感傷)에서 빼내오려면 우선 그를 일으켜 세우고 움직일 것을 강요하면 된다. 이렇게 보면 감상(感傷)은 그 심리적(心理的) 성질(性質)을 바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특별히 감상적(感傷的)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들의 오랫동안의 생활양식(生活樣式)에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감상(感傷)을 할 경우 우리는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지, 몸을 움직여서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아니, 나는 거의 바라보기조차 하지 않는다. 감상(感傷)은 어떤 것에 대해서 감상(感傷)하드래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 머무는 것이지 사물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비평(批評)이라든가, 회의(懷疑)라든가 하는 것도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하나의 감상(感傷)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비평과 진정한 회의(懷疑)는 사물(事物)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감상(感傷)은 사랑과 미움과 슬픔 등, 혹은 다른 감정에서 생기는 사념(思念)과는 구별되며, 특히 이것들과 견주어지는 정념(情念)의 한 종류(種類)도 아니다. 오히려 감상(感傷)은 모든 정념(情念)을 아우르는 하나의 형식(形式)인 것이다. 모든 정념(情念)은 가장 거친 것으로부터 가장 지적(知的)인 것에 이르기까지 감상(感傷)의 형식으로써 존재(存在)내지(乃至)는 작용(作用)할 수 있다. 사랑도 감상(感傷)이 될 수 있고 미움도 감상(感傷)이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감상(感傷)은 정념(情念)의 하나로서 보편적(普遍的)인 형식인 것이다. 그것이 아무 실체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도, 그것이 정념(情念)의 하나의 종류가 아니고 하나의 존재(存在) 양상(樣相)이기 위해서다.
감상(感傷)은 모든 정념(情念)의 이른바 표면(表面)에 있다. 이렇듯 감상은 모든 정념의 입구(入口)이면서도 출구(出口)인 것이다. 우선 뒤의 경우가 주의(注意)된다. 하나의 정념(情念)은 그 활동을 멈출 때 감상(感傷)으로써 뒤를 끌어 오고 감상(感傷)으로써 맺는 것이다. 울음이 정념(情念)을 진정(鎭靜)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울음은 심한 정념의 활동을 감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가까이 있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울음만으로는 모자라는 것이다. 울어서 무너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정지(靜止)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감상적(感傷的)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든 정념(情念)에 이 고유의 활동을 주지 않고, 표면의 입구에서 확산(擴散)하고 마는 사람인 것이다. 해서 감상적인 사람은 결코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없지만 무해(無害)한 사람인 것이다.
감상(感傷)은 모순(矛盾)을 모른다.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에 마음이 흐트러트린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감상(感傷)으로 되면 사랑도 미움도 하나로 녹아 합쳐진다. 운동(運動)이 모순(矛盾)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에서도 감상(感傷)이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냥 흐르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냥 떠내려간다 할 것이다. 감상(感傷)은 화해(和解)의 좋은 수단인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가끔은 종교적인 마음과 바수어진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혼돈되곤 한다. 우리의 감상적(感傷的)인 마음은 불교의 무상관(無常觀)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를 엄격하게 구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감상은 그냥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사그라진다.
정념(情念)은 그의 고유(固有)의 힘에 의해서 창조(創造)되거나 파괴(破壞)된다. 그러나 감상(感傷)은 그렇지 않다. 정념(情念)은 그 고유의 힘에 의해서 이미지네이션(imagination:구상:構想力)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감상(感傷)을 수반(隨伴)하는 것은 움직임밖에 없다. 이미지네이션은 창조적(創造的)이다. 그러나 움직임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과의 사이의 차이(差異)가 있는 것이다.
감상적(感傷的)인 것이 예술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감상(感傷)일 뿐이다. 또 감상적(感傷的)인 것이 종교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새로이 그 이상(以上)으로 감상적(感傷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본래부터 예술(藝術)과 감상(感傷)에서의 탈출(脫出)인 것이다.
명상(瞑想)은 많은 경우에 감상(感傷)에서 나오는 데, 적어도 감상(感傷)을 수반(隨伴)하고, 혹은 감상(感傷)으로 변해간다. 사색(思索)하는 사람은 감상(感傷)의 유혹(誘惑)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감상(感傷)은 취미(趣味)로 될 수가 있고 또 이따금 그렇게 된다. 감상(感傷)은 이처럼 감미로운 것이고 유혹적(誘惑的)인 것이다. 명상(瞑想)이 취미(趣味)로 되는 것은 그것이 감상적(感傷的)으로 되기 위해서다.
모든 취미(趣味)와 마찬가지로 감상(感傷)은 본질적(本質的)으로는 과거(過去)의 것 위에서만 활동하는 것이다. 그 것은 되는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것은 감상적(感傷的)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감상적(感傷的)인 인간은 회고(回顧)하기를 즐긴다.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감상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감상의 대상일 수 있는 미래는 진정한 미래는 아니다.
감상(感傷)은 창조적(創造的)이지 않고 감상적(鑑賞的)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상(感傷)에 의해서 무엇을 감상(鑑賞)하겠다는 것인가! 사물(事物)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 우리가 사물을 감상(鑑賞)할 수 있는가! 감상(感傷)에서 우리는 사물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맛보기조차도 못하고, 그냥 감상(感傷) 그것만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감상(感傷)은 주관주의(主觀主義)인 것이다. 젊은이가 감상적(感傷的)인 것은 그 시대가 주관적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주관주의자는 어느 정도 개념적(槪念的) 혹은 논리적(論理的)으로 치장한다 해도, 그 내실(內實)은 감상가(感傷家)일 수밖에 없는 예가 많다.
모든 정념(情念)속에서의 기쁨은 감상(感傷)으로 되기가 지극히 적은 것이다. 거기에 기쁨을 얻는 특별한 적극성(積極性)이 있다.
감상(感傷)에는 개성(個性)이 없다. 이는 진정(眞正)한 주관성(主觀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상(感傷)은 대중적(大衆的)이다. 해서 대중문학(大衆文學)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감상적(感傷的)인 것이다. 대중문학의 작가는 과거의 인물을 취급하는 것이 일상인 것도 이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들과 순수문학(純粹文學)작가와의 차이는 그들이 현대의 인물을 그와 같게 기교적(技巧的)으로 묘사할 수 없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형편 속에도 예술론에서의 이러저러한 중요한 문제들이 내포(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감상(感傷)은 대체적인 경우에 만네리즘(mannerism:현상유지적경향:現狀維持的傾向)에 빠져들어 있다.
신체의 외관(外觀)이 정신적 상태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언뜻 보기에 지극히 완고(頑固)한 사람이 몹시 감상적(感傷的)인 경우가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행(旅行)은 사람을 감상적(感傷的)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는 움직임으로써 감상적(感傷的)으로 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의 최초의 정의(正義)가 틀린 것으로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행에서 사람이 감상적(感傷的)으로 되기 쉬운 것은 오히려 그가 그의 일상적인 활동에서 떨쳐 나왔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상(感傷)은 우리의 주말(週末)인 것이다.
행동적(行動的)인 사람은 감상적(感傷的)일 수 없다. 사상가(思想家)는 행동(行動)하는 사람처럼 사색(思索)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면(勤勉)이 사상가의 덕(德)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감상적(感傷的)으로 되는 유혹(誘惑)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事物)이 유전(流轉)하는 것을 보고 감상적(感傷的)으로 되는 것은 사물을 붙들고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자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자기도 또한 유전(流轉)하는 그 속에 있음을 알 때, 우리는 그저 감상(感傷)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