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思想)이란 무엇인가? 이는 우리 생활에서 찾아 생각해보면 명료(明瞭)해진다. 즉 생활은 사실(事實)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경험적(經驗的)인 것이다. 이에 반해서 사상(思想)에는 언제나 가설적(假說的)인 면이 있는 것이다. 가설적(假說的)이지 않은 사상(思想)은 사상(思想)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상이 순수하게 사상일 수 있는 힘은 가설의 힘인 것이다. 사상은 그 사상의 크기에 따라서 위대해지는 것이다. 만약 사상에 가설적인 면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생활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생각한다고 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분명한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이니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더욱 우리생활과 구별되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가설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다.
생각한다는 것은 과정적(過程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과정적인 사고로 해서 방법적(方法的)으로 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사고(思考)가 과정(過程)적인 것은 가설적(假說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가설적인 사고(思考)로 해서 방법적(方法的)인 것이 된다. 또 회의(懷疑)를 말한다 해도 방법적(方法的)이기 위해서는 가설(假說)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데카르트<Descartes, René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자연학자(1596-1650).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시조(始祖). 회의(懷疑)하는 정신을 내세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하였음. >의 회의(懷疑)에서 모범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설적(假說的)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논리적(論理的)으로 생각한다는 것과는 단순히 같지는 않다. 가설(假說)은 어떤 의미에서는 논리보다도 근원적(根源的)인 것으로서 논리는 오히려 여기에서 나온다. 논리(論理), 그것이 하나의 가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가설은 자기 자신이 논리를 만들어내는 힘조차도 갖고 있다. 논리보다도 불확실한 것에서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논리도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이 바로 가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확실(確實)한 것은 불확실한 것에서 나오므로 이와 역(逆)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확실한 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形成)되어진 것으로, 가설(假說)은 이 형성적(形成的)인 힘(力)인 것이다. 인식(認識)은 모사(模寫)가 아니고 형성(形成)된 것이다. 정신(情神)은 예술가(藝術家)이지 거울(鏡)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사상(思想)만이 가설적(假說的)이고 인생은 가설적이지 않은 것일까! 인생도 어떤 가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이 가설적인 것은 인생이 허무(虛無)와 관련지어 있기 때문이다. 각자(各自)는, 말하자면 하나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사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이런 증명은 대개 불필요한 것이다.- 실로, 하나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래서 인생은 실험(實驗)이라고 생각된다. - 가설 없는 실험이란 있을 수 없다.-본래 인생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고유(固有)의 가설(假設)을 추구(追求)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인생이 가설적(假說的)이라고 한다면, 사상(思想)이 인생에 대해서 가설적(假說的)인 것과 구별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생 거기에 대해서도 가설적(假說的)인 것으로 하여 구별되는,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가설이 단순히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문학적 사고(思考) 중에도 있는 것으로서도 분명해진다. 소설가의 창작행동은 그냥 한 가닥으로 그의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생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의미는 이와 비슷한 것이다. 가설(假設)은 적어도 이럴 경우 단순한 사유(思惟)에 속하지 않고 구상력(構想力))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픽션(fiction:허구:虛構) 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가설은 부정(不定)한 것이어서 가능적(可能的)이다. 때문에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이 부정한 것, 가능적(可能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논리적(論理的)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론적(存在論的)의미에서 그렇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인간의 존재가 허무의 조건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허무(虛無)와 혼합(混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설의 증명이 창조적형성(創造的形成)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소설에 있어서와 매 한가지다. 인생에서 실험(實驗)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듯 형성(形成)을 말하는 것이다.
상식(常識)을 사상(思想)과 구별 짓는 보다 중요한 특징은 상식에는 가설적(假說的)인 면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상(思想)은 가설(假設)이 아니고 신념(信念)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신념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사상이 가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상식(常識)의 경우에는 새삼스레 신앙이 필요하지 않다고 함은 상식(常識)에는 가설적(假說的)인 면이 없기 때문이다. 상식은 이미 어떤 신앙(信仰)인 것이다. 여기에 반(反)하여 사상(思想)은 신념(信念)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상(思想)같은(스러운) 사상(思想)은 늘 극단적(極端的)인 면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가설(假說)의 추구(追求)이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상식(常識)이 있는 큰 덕(德)은 중용(中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상(思想)은 행동으로 옮아가면 사느냐 죽느냐하는 성질(性質)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위험한 성질은 행동하는 사람은 이해하고 있으나 사상에 종사하는 사람은 오히려 잊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위대(偉大)한 사상가만이 이를 행동(行動하는 사상가보다도 깊이 알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떠들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이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오해를 받는 일이 늘 사상가의 운명처럼 된 것은 이 세상에서는 그의 사상이 하나의 가설(假設)임을 이해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죄의 절반은 대개 사상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그 자신이 갖는 사상이 가설적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그의 태만(怠慢)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탐구(探求)를 계속하는 한 사상(思想)의 가설적(假說的) 성질(性質)은 끊임없이 이어 나타날 것이다.
절충주의(折衷主義)가 사상으로써 무력(無力)한 것은 가설(假說)의 순수성(純粹性)을 잃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좋거나 싫거나를 막론하고 상식에 가깝고, 그 상식(常識)에는 가설적(假說的)인 데가 없기 때문이다.
가설(假設)이라는 사상(思想)은 근대과학(近代科學)이 가져온 무서운 사상이면서 가장 큰 사상인 것이다. 근대과학의 실증성(實證性)에 대한 오해(誤解)는 그 속에 담겨진 가설(假設)의 정신(精神)을 온전히 놓쳐버렸거나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데서 생긴 것이다. 이렇게 돼서 실증주의(實證主義)는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설(假設)의 정신(精神)을 알지 못하면 실증주의(實證主義)는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미끼기요시/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