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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개성(個性)에 대하여


   개성(個性)의 깊숙한 전당(殿堂)에 다다르는 길은 두바이 거리의 문(門)수량만큼이나 많다. 나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신앙으로 사는 고백(告白)의 길이고, 나의 하나하나 생활은 나의 종교를 설파하는 전도(傳道)인 것이다. 나의 마음의 집에 들락거리는 모든 마음은 나의 집 깊숙한 곳에 모시고 싶은 것들의 직접적인 인식을 나에게서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일어나고 발전하고 소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것을 흘러 보내고 무한한 것을 잡으려는 사람은 나의 단 하나의 사상(思想) 감정(感情) 혹은 행위(行爲)를 알려는 것조차도 내가 정말로 신을 믿는 사람인가 아니면 바알의 승려인가를 통찰(洞察)할 것이리라. 그럼에도 부구하고 많은 길이 있다는 것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미로(迷路)가 있을 뿐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에 수없이 많은 심상(心象)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것을 의식한다.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뇌리에 나타나는 표상(表象)이나 감정(感情)이나 의욕(意慾)의totum discretum(추상?)인 것인가! 이것이 “관념(觀念)의 올가미”라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일체의 활동이 오직 내게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무수한 심상(心象)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여러 가지 희비극(喜悲劇)을 연출(演出)하는 무대(舞臺)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그리로 들어가지만 아무것도 거기에서 나오지 않는 “사자의 동굴(洞窟)”이라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나의 정신활동과정의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생산(生産)과 쇠망(衰亡)의 일체(一切)가 단지 나로 인하여 일어남을 알고 있다.

 

   만약 나라고 하는 사람이 나의 모든 운동(運動)과 변화(變化)가 그 앞에서 연출되는 배경(背景)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로 기괴(奇怪)하고 좋지 않은 unding 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에게 어떤 지시(指示)를 하여 얻어낼 수 없는 내용조차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 관해서 표상(表象)할 수 있는 성질(性質)은 남김없이 이 배경(背景)을 기다려야 가능(可能)해지고 배경 그 자체(自體)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벌써 개성(個性)일 것이 아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런 것을 단지 아무 것도 아니며 또 아무것에서도 생겨나지 않는 추상적(抽象的)실체(實體)로 하여 생각해낼 뿐이다. 이처럼 나는 허무(虛無)관 앞에 머문다. 나에게는 결코 체험될 수 없는 이런 악마적(惡魔的)인 unding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색깔이 있고 소리가 울려나오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맛보게 하고, 핥아 없애며 먹어치우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에서 다시 일곱 빛이 아롱이는 아름다운 세상에 돌아갈 수 있는 수단(手段)을 알지 못한다.

 

   나 또한 “만 가지 생각을 품는 사람”이다. 나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며 으르렁거리며 서로 반대 하고 서로 모순되는, 숱한 심사(心思)를 찾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것을 몹시 좋아 하고 또 돕는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짜증이 나면 미워하고 싸움을 걸려는 마음까지도 생긴다. 혹시나 이런 내 안에 나타나는 정신현상이 단지 심리학적 법칙에 쫓아서 결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이 내게는 ”관념의 밧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심리학자가 나를 이해하려고하여 시험하려하는 설명은 정당한 것이 될 터이다. 그들은 내 안에 나타나는 정신현상을 일정한 범주(範疇)의 법칙에 따라 분류(分類)하고 총괄(總括)하고 또 나의 기억(記憶)이 시각형(視覺型)에 속하는지 청각형(聽覺型)에 속하는지 아니면 내 성격(性格)이 다혈질(多血質)인가아니면 냉정하고 인내력이 간한 형인가 등등을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抽象的)인 개념(槪念)과 언어(言語)는 모든 것에서 개성(個性)을 빼앗아 한 가지 검은 덩어리(흑괴黑塊)를 만들고 비타(pita)와 폴(pole)을 같게 하는, 좋지 않은 데모크라시를 실행하는 것이다. 나는 보편적(普遍的)인 유형(類型)이나 표본(標本) 혹은 전달(傳達)기구(器具)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법칙(法則)이라서가 아니라 예외를 두기위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인간이다’라고. 일곱 빛깔 하늘의 무지개를 잰다한들 누가 대체로 인간 영혼의 궤도를 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나의 개성이 한층 많이 기술되고 정의될 수 있다면 될 수 있는 만큼 그 가치(價値)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은 나에게 개성(個性)은 무한(無限)한 존재(存在)라고 가르쳐주고, 나도 또한 그렇게 믿고 있다. 지구의 중심처럼 오직 하나이지 두 개가 아닌 것이 개성(個性)인 것은 아니다. 1호,2호처럼 구별되는 객관적인 개별(個別)성 혹은 다른 것과 비교되는 독자성(獨自性)을 갖고 있는 것이 개성인 것은 아니다. 개성이란 오히려 무한한 존재인 것이다. 내가 무한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나의 심리의 무수(無數)한 표상(表象) 감정(感情) 의욕(意慾)이 끊임없이 교차한다고 하는 의미인 것인가! 그러나 만약 나로 하여금 이 정신과정이 단순이 우연적(偶然的)이거나 혹은 외면적(外面的)인 결합(結合)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단지 현상(現象)으로서 존재할 밖에 없다. 내가 현상(現象)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으면 영겁(永劫)의 시간의 흐름에서 한 낱 점으로 떠오른 물방울에도 비길 수 없는 나의 생에서, 어떻게 많은 것이 그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인가는 차치(且置)하고, 잠간동안 있다 어느 듯 꺼져버릴 나의 운명이지 않겠는가! 이글거리는 태양조차 용서 없는 시간의 흐름은 나의 뇌리(腦裏)에 스치는 심상(心象)의 무한(無限)을 한 점 없이 거두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내가 진정 무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려면 내 안에 시간을 만들어내고, 또 그 시간을 없앨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떠나서 개별(個別)화의 원리(原理)를 생각해 낼 수 있는가! 개성(個性)이라는 것은 1회(回)적인 것, 되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단순히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만 구별(區別)되어지는, 박절기<독Metronom拍節器(음악: 박자를 맞추는 기기)>에서 이어져 나는 하나하나의 음을 개성(個性)이라고 생각할 것을 주저한다.

 

   시간(時間)은 개성의 유일성(唯一性)의 외면적(外面的)인 징표(徵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본질적(本質的)으로는 개성은 개성으로서의 활동자체로서 구별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개성의 유일성은 그것이 독립된 존재로서 <다른 어떤 것이 들락거리는 창문을 갖지 않고>자족적(自足的)인 내면적(內面的)발전(發展)을 이루어 나가는 데에서 성립(成立)되는 것으로써, 개성은 자기 활동적(活動的)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구별(區別)적이므로 해서 자기의 유일(唯一)성을 주장(主張)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내가 세상에서 어느 때에 생을 향유(享有)하느냐는 것은 흡사(恰似) 음악에서 하나의 곡의 어떤 순간에 어떤 음이 나는 것이냐 하는 것이 우연(偶然)이 아닌 것처럼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개성(個性)의 내면적(內面的)인 의미(意味)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형식(形式)에 의해서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으로 해서 진정한 시간,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이는 자연처럼 침묵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는 것처럼 개성을 이해하려는 이는 시간의 흐름의 떠버리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능변(能辯)을 잡고 그 목을 비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시간의 흐름에서 이탈하려면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내어 끝까지 갈 수 없는, 아주 먼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를 던져서 진정한 시간으로 됐을 때이다. 단순(單純)한 인식(認識)의 형식(形式)으로서의 시간으로부터 해방(解放)되어서, 순수(純粹)하게 지속되는 자유(自由)에 몸을 맡겼을 때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는 개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나는 단지 일함으로써 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점점 옮아가면서 흐르는 검은 막(幕)같은 시간의 속박(束縛)과 굴레에서 도망쳐 나올 때 나는 무한(無限)을 얻을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자기(自己)활동적(活動的)인 것은 무한(無限)의 것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단지 수 없이 많은 부분(部分)으로 합성(合成)된 것이 무한(無限)한 것이 아니고, 무한한 것에서는 부분(部分)은 전체(全體)가 한정(限定)지어져 생겨난 것으로써만 언제나 전체(全體)를 표현(表現)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모든 혼(魂)을 내 던져서 일할 때 내 하나하나의 행위에는 나의 개성(個性)의 전체(全體)가 현실적(現實的)인 것으로 되어 언제나 표현(表現)되는 것이다. 무한한 것은 하나의 목적, 또는 기도(企圖)에 통일(統一)되어 있는 것으로 그 발전(發展)의 한 단계(段階)는 필연적(必然的)으로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계기(契機)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지(理智)의 기교(技巧)를 떠나서 순수(純粹)한 학문적(學問的) 사색(思索)에 빠져들 때, 감정(感情)의 방탕(放蕩)을 떠나서 순수(純粹)한 예술적(藝術的) 제작(制作)에 들어갈 때, 욕망(慾望)의 타산(打算)을 물리치고 순수(純粹)한 도덕적(道德的) 행위(行爲)를 행할 때, 나는 이런 무한(無限)을 체험(體驗)한다. 사유(思惟)할 수 없이 다만 체험할 수가 있는 무한은 언제나 가치(價値)에 충만한 것, 곧 영원(永遠)한 것이다. 이것은 의식(意識)할 수 있거나 의식할 수 없거나 규범의식(規範意識)에 의해서 하나의 과정(過程)에서 다음과정으로 필연적(必然的)으로 이끌리는 한없는 창조적 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필연성(必然性)은 본래 보다 인과율(因果律)의 필연성(必然性)이 아니고 초시간적(超時間的)이며 개성적(個性的)인 내면적필연성(內面的必然性)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무한을 체험하는 것, 즉 참으로 순수하게 되기가 지극히 드물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많은 경우<사람들은 그것을 이성(理性)이라고 이름 하여서 단지 모든 동물보다도 한층 동물적(動物的)으로 되기 위해서 쓰고 있다>고 한 악마(궤테의 희곡에 나오는 악마:惡魔:Mephistpheles)의 비웃음과 같은 이성의 사용자인 것이다. 나의 감정(感情)은 대체(大體)로 생산적(生産的)이고 창조적(創造的)이지 못하고 게으르고 건방지게 되어 아첨(阿諂)과 사람을 속이기에 걸맞은 도락(道樂)을 하려고 한다. 나의 의지(意志)는 실(實)로 이따금 이기적(利己的)인 타산(打算)이 짜내는 망(網)속에 말려들어서 갇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개성(個性)이 요람(搖籃)과 함께 내게 보낸 선물(膳物)이 아니고, 내가 싸워 얻지 않으면 안 되는 이념(理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이 가늠하기 어려운 보물(寶物)이 자기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근원(根源)에 돌아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알았다. 구(求)한다고는 하지만 그대로 자기에 집착할 뿐 다른 무엇인가를 그것에 부쳐 더해지는 것은 없다. 사람은 자기를 멸망(滅亡)시킴으로 해서 되레 자기를 얻는다. 그런고로 나는 위대한 종교가가<나는 이제 살아있음에 그리스도도 내 안에 계시다> 고 했을 때 그가 그리스도로 된 것이 아니고, 그가 참 자기(自己)자신(自身)으로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나의 개성은 다시 살아남으로 해서만이 내 안에 사는 것이 된다.

 

   철학자는 개성이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성은 우주(宇宙)에 사는 거울인데, 하나로서 일체(一切)의 존재(存在)인 것이다. 마치 서로 모이는 직선(直線)이 만들어내는 무한의 각(角)이 합쳐 만나는 단 하나의 중심(中心)과 같은 것이다. 모든 개별적(個別的) 실체(實體)는 신(神)이 전(全) 우주(宇宙)를 위해 이루신 결의(決意)를 들어내는 것으로서 한 개의 개성(個性)은 전 세계(全世界)의 의미(意味)를 단 한 가지 방법으로 현실화(現實化)하여 표현(表現)한 소우주(Mikrokosmos:小宇宙:우주의 축도로서의 인간)다. 개성(個性)은 자기 자신 안에 다른 무한한 관계를 싸 안으며, 더욱이 전체가운데 차지하면서도 나란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개성(個性)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전 우주(全宇宙)와 무한(無限)의 관계(關係)를 이루는 것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을 향유(享有)하는, 또는 향유하고자 하는 무수한 동포(同胞) 중에서, 시공(時空)과 인과(因果)에 속박(束縛)된 것으로서의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은 정말로 미미(微微)하게 적지 않는가! 이렇게 적은 수의 사람조차도 그들의 끊이지 않는 교섭(交涉)을 나는 귀찮아하지 않는가! 나는 오히려 고독을 찾는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생기 있는 거리를 피해서 어둠 컴컴한 자기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참으로 고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은) 별을 바라볼 때 무엇보다 고독하게 되는>것이다. 영원한 것으로서의 관상(觀想)속에 자기를 잃었을 때, 나는 아름다운 절대적(絶對的) 고독(孤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철학자가 가르쳐준 것처럼 신(神)의 예정(豫定)조화(調和)에서 다른 것과의 무한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인가! 나는 신(神)의 의지(意志)결정(決定)에 제약(制約)된 전 세계(全世界)와 불변(不變)의 규칙적(規則的)관계(關係)로 되어 있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의 필연(必然)의 기계적(機械的)인 것에 딸려 있으며 나의 가치(價値)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고 나를 넘어선 보편적(普遍的)인 것에 의존(依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오히려 자유를 찾는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자유롭게 됨은 이지(理智)의 세공(細工)과 감정(感情)의 유희(遊戱)와 욕망(慾望)의 타산(打算)을 버리고 순수(純粹)하게 창조적(創造的)으로 되었을 때이다. 이런 고독(孤獨)과 같은 창조(創造)같은 속에 깊숙이 잠겨들 때에 시인이“Voll milden Ernsts, in thatenreicher Stille" 라고 노래한 시간에서 나는 우주와 무한한 관계에 서고 일체(一切)의 혼(魂)과 아름다운 조화(調和)로 껴안는 것이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그 때에 나는 어떠한 무한의 것도 그 안에는 주어지지 않는 시간적 세계를 초월하여 우주의 창조적 중심에 자기중심(自己中心)을 옆에 두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존재, 즉 한 문화인으로써의 나, 사회에서의 모든 중심에서 활동하든 안하든, 전(全) 우주(宇宙)와 무한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또 개성의 유일(唯一)성은 그것이 전체의 자연(自然)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유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으로는 그것이 전체의 문화 속에 맡겨진 임무(任務)의 유일성(唯一性)에 기초하여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개성(個性)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무한(無限)한 마음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한한 마음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이란 창조이고 창조라는 것은 대상(對象)에서 자기(自己)를 들어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자기를 부정하고 상대에게서 자기를 살리는 것이다. <하나로써 일체(一切)인 신(神)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비밀(秘密)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자기 자신을 보기위해서 창조될 수가 없었다. >신의 창조는 신의 사랑이고 신은 창조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서 순수한 창조적 활동에 몰입할 때, 자기의 독자적(獨自的) 한 물체(物體)로써, 즉 자기 개성(個性)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하지 못하는 한탄이 있고, 낳지(生)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낳는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다. 사랑하지 않는 그가 순수한 생활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기적인(利己的)인 공부나 감상적(感傷的)인 놀음이나 잔재주를 부리는 기교(技巧)가 점점 많은 유혹과 강요로써 그를 방해함을 통감(痛感)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그는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절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악(惡)과 오류(誤謬)와의 고통에 피를 흘러낼 때, 참회(懺悔)와 기도(祈禱)를 위해서 대지(大地)에 눈물을 쏟을 때, 참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있다. 태만(怠慢)과 아집(我執)과 오만(傲慢)만큼 우리를 자기(自己)본질(本質)의 이해(理解)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윽고 다른 이를 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혼(魂)이 스스로 이뤄낸 높이만큼 상응(相應)하게, 우리의 주위(周圍)에 점차 많은 개성(個性)을 발견(發見)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 맹목적(盲目的)인 사람이 보는 이 세상은 단지 회색빛 일색인 것이다. 자기의 혼(魂)을 또 다잡아 죄는 눈을 가지고 응시(凝視)하는 사람 앞에는 일체의 것이 빛과 색으로 아름답게 교착(交錯)하여 펼쳐지는 것이다. 마치 뛰어난 화가가 암스텔담의 유다거리에도 언제나 회화적(繪畵的)인 아름다움과 기개(氣槪) 높은 위엄(威嚴)을 드러내서, 그곳 주민이 그리스인이 아닌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自己)개성(個性)의 이해에 투철(透徹)했던 사람은 보다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조차 그들대로의 개성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래서 나는 여기서도 개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사랑함으로써 다른 개성을 이해한다. 갈라놓고 골라 줍는 이지(理智)를 버리고 다가가 껴안는 정의(情意)로써 이것을 안다. 즉효(卽效)의 인상(印象)이나 변덕스런 직관(直觀)을 갖는 것이 아니고, 참을성 있는 사랑과 온화하고 아름다운 통찰에 의해 이런 것들을 파악(把握)하는 것이다.- <그대여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主)님이신 그대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제일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역시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대의 이웃을 사랑하여라.>/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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