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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성공(成功)에 대해서


   오늘의 윤리학에서 거의 놓쳐 잊어버린 것 중에서 두 가지의 보다 현저한 것은 행복과 성공이란 것이다. 더욱이 그 둘이 상반되는 의미에 있어서 그렇게 보인다. 즉 행복은 어느새 현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해서, 그래서 성공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것으로 봄으로 해서 그렇다.

 

   고대인(古代人)이나 중세적 인간(中世的人間)의 모랄<Morale도덕. 윤리. 수신(修身)>중에는 우리들이 갖는 의미에서의 성공이란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들 모랄의 중심에 행복이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현대인의 모랄에는 성공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공한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사는 문제로 될 때에 행복이란 것은 어느새 사람들의 깊은 관심에서 벗어나고 만다.

 

   성공의 모랄이 근대에 와서 특징적인 것으로 된 것은, 진보(進步)라는 관념(觀念)이 근대에서의 특징적인 것인데 닮아있는 것이다. 실(實)은 양자간(兩者間)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 계몽주의(啓蒙主義)의 윤리(倫理)에서의 행복론(幸福論)은 행복의 모랄에서 성공의 모랄에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했다. 성공이란 것은 진보의 관념과 같고 직선적(直線的)인 향상(向上)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행복에는 본래 진보라는 것은 없다.

 

   중용(中庸)은 하나의 주요(主要)한 덕(德)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덕의 근본적인 틀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이 관점(觀點)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성공에 관한 모랄의 근대적인 새로움이 있다.

 

   성공의 모랄은 대체로 비종교적(非宗敎的)인 것으로써, 근대의 비종교적인 정신에 적합(適合)하게 되어있다.

 

   성공과 행복을 불성공(不成功)과 불행처럼 같이 보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참된 행복이 무언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의 불행을 성공하지 못한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동정이 가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질투하는 사람은 행복을 성공과 같게 보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각 개인이 것이고, 인격적이고, 성질(性質)적인 면이 있지만, 성공은 일반적인 것이고, 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은 그 본성상 다른 사람의 질투를 사기가 쉽다.

 

   행복이 존재(存在)에 관련된 것인데 반해서, 성공은 과정(過程)에 관련되어 있다.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그를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자기로서는 자기에 관계되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이중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질투당할 염려가 있다.

 

   Streber-이 독일어로써 만이 적절히 표현되는 유형의 성공주의자야말로 속물(俗物)중의 속물인 것이다. 다른 유형의 속물은 때로는 기분에 따라서는 속물근성을 그만두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노력가형의 성공주의자는 결코 궤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속물로서 완전한 셈이다.

 

   슈트레바라는 것의 의미는 산다는 것은 원래 모험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진리를 어떤 경우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른다. 상상력(想像力)의 결핍(缺乏)이 이런 노력가(努力家)형을 특징(特徵)짓고 있는 것이다.

 

   성공도 인생의 본질적인 모험에 속한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때 성공주의는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리라. 성공을 모험의 견지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모험을 성공의 견지에서 이해할 것인가는 본질적으로 틀린 것이다. 성공주의는 후자의 경우이고 거기에는 진정한 모험은 없다. 인생은 도박이라고 하는 것만큼 인생을 제멋대로 이해하고 남용하고 있는 것도 없으리라.

 

   한 가지의 스포츠를 성공으로 추구하는 이는 건전한 사람이다. 순수한 행복은 각자에게는 오리지날인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그렇지 않다. 에피고넨(獨:Epigonen:모방자 風) 은 많은 경우에 성공주의와 이어져있다.

 

   근대의 성공주의자의 틀(형型)은 명료(明瞭)하지만 개성(個性)이지는 않다. 고대에는 개인의식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러하기에 틀(형型)을 갖춘 인간으로서 개성적(個性的)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식(個人意識)이 발달한 현대에 있어서는 오히려 틀(型)을 갖추어야할 인간이 양적(量的)이고 평균적(平均的)인 인간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개성적(個性的)이지 않게 되었다. 현대문화(現代文化)의 비극(悲劇), 아니 오히려 희극(喜劇)은 틀(형型)과 개성(個性)과의 분리(分離)에 있다. 거기에 더하여 개성(個性)에는 틀(형型)의 강(强)함이 없고, 다만 틀(형型)이란 개성적(個性的)인 투명성(透明性)조차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성공의 모랄은 낙천주의(optimism낙관론)에 의지하고 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주된 의의(意義)로서의 낙천주의인 것이다. 낙천주의의 밑바닥에는 합리주의(合理主義) 혹은 주지주의(主知主義)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낙천주의가 이 방향으로 세련(洗鍊)될 경우에는, 더욱 어떤 성공주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서 붙어있을 것이다.

 

   성공주의자(成功主義者)가 비합리주의자(非合理主義者)일 경우, 그는 두렵기조차 한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근대적(近代的)인 모험심(冒險心)과, 합리주의(合理主義)와, 낙천주의(樂天主義)와, 진보적관념(進步的觀念)과의 혼합(混合)에서 생긴 최고의 것은 기업가적정신(企業家的情神)이다. 고대의 인간이상(人間理想)이 현자(賢者)인데, 중세(中世)에는 그들이 성자(聖者)였던 것처럼 근대의 것은 기업가(企業家)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반에는 그렇게 순수하게 파악되지 않았던 것은 근대 배금주의(拜金主義)의 결과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권력을 갖고 있다면 성공주의자처럼 다스리기 쉬운 것은 없으리라. 부하를 다스리기 쉬운 길은 그들의 입신출세(立身出世)의 이데오로기를 불어넣어 주는데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독일의 철학자(1844-1900).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으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인 형이상학으로 구축함. 이에서 출발하여 ‘반시대적인 고찰’로 시대의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여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으며,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한층 분명해지고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으로 치고 새로운 이상에 대한 가치 전환을 기도함>의 모랄<프랑스어morale도덕. 윤리. 수신(修身)>의 근본(根本)이 성공(成功)주의에 대한 극단적(極端的)인 반감(反感)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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