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에서는 무엇이나 우연(偶然)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인생살이는 모든 것이 필연이다. 이러한 인생을 우리는 운명(運命)이라고 이른다. 만약 인생 일체가 필연(必然)일 것 같으면 운명이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인생일체가 우연(偶然)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에도 운명(運命)이라고 하는 것 또한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우연이란 것이 필연으로, 필연이란 것이 우연의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해서 인생은 운명인 것이다.
희망은 운명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운명이라고 하는 부호(符號)를 거꾸로 한 것이다. 만약 인생일체가 필연일 것 같으면 희망이란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고 인생일체가 우연일 것 같으면 마찬가지로 희망이란 것이 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운명(運命)인 것과 같이 인생은 희망(希望)인 것이다. 운명적(運命的)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F라고 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V라고 하는 도시에 사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P라고 하는 지위를 얻는 것이다. 고 하는 등등.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왜 이것이 희망인지, 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인지, 목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기대(期待)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를 따지지 않는다. 희망은 욕망과도, 목적과도, 기대와도 같지는 않은 것이다. 내가 그녀를 만났다는 것은 운명이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운명이었다. 내가 지금의 지위에 있는 것은 운명이었다. 각각의 이루어짐이 나에게는 운명인 것은 나의 존재가 전체로서 본래 운명이기 때문이다. 희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내용이 희망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인생이 전체로써 본래 희망이기위해서다.
그것은 운명(運命)이기에 절망적(絶望的)이라고들 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운명(運命)이라고 할수록 거기에 또 희망(希望)도 있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 다는 것은 언젠가 실망(失望)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망의 고통을 맛보기 싫은 사람은 처음부터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리는 희망이란 것은 희망이 아니고 오히려 기대라고 하는 것이다. 각각의 내용으로서의 희망은 놓치는 수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놓쳐버릴 것 없는 것이 본래의 희망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실연(失戀)이란 사랑하지 않아서 인가! 만약 그가 또는 그녀가 어느새 열렬이 사랑하지 않는 다고 한다면 그나 그녀는 벌써 실연의 상태가 아니고 이미 다른 상태에 옮겨가 있는 것이다. 실망(失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실제로 사랑과 희망과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희망은 사랑에 의해서 싹트고 사랑은 희망에 의해서 키워진다.
사랑도 운명인 것인가. 운명이 필연으로 자기의 힘을 드러낼 때 사랑도 필연으로 묶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운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희망과 묶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희망이라는 것은 생명의 형성력(形成力)이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살아 있는 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삶을 가꾸어(形成) 나가기위한 것이다. 희망은 생명의 형성력(形成力)이고 우리의 존재는 희망에 의해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생명의 형성력이 희망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형성이 무(無)에서의 형성이라고 하는 의미도 갖고 있음에 의한 것이다. 운명이란 것은 이렇듯 무(無)가 아니겠는가! 희망은 거기에서 나오는 관념(觀念 : idee)적 힘인 것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인간존재의 형이상(形而上)적 본질(本質)을 드러내는 것이다.
희망을 갖고 사는 이는 언제나 젊음을 유지한다. 아니 생명 그자체가 본질적(本質的)으로 젊음을 의미하고 있다.
사랑은 내게 있는 것도 상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 테면 그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이에 있다함은 둘의 어느 쪽 이라기보다, 또는 그 둘의 관계라기보다는 근원적(根源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둘이 사랑할 때, 말하자면 제3의 것 즉, 둘 사이에 놓인 될성부른 것으로 자각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제3의 것은 전체적인 둘의 어느 쪽 하나의 것일 수도 있다. 희망도 이것과 닮은 데가 있는 것이다. 희망은 나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나의 내부의 것이다. 진정한 희망은 절망(絶望)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은 정말 그 것, 즉 희망이 자기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자기를 포기(抛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절망에서는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희망에서는 자기를 지키지 못하는 것, 이것은 근대의 주관적(主觀的)인간에서 특징적(特徵的)인 상태(狀態)인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은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인격주의(人格主義)의 근본(根本)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른 데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잃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근대 인격주의는 주관주의(主觀主義)로 됨으로 인해서 해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희망과 현실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희망은 불확실한 것인가? 희망은 언제나 인생이라고 할만치 확실성을 갖고 있다.
만약 일체(一切)가 보증(保證)되어 있다면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이처럼 확실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사안에서 보증될 것을 바라는 인간---사람은 전쟁에 대하여 조차 보험회사를 설립한다.---은 내기(賭博)에 열중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발명(發明)된 우연(偶然), 억지로 만들어진 운명에 마음을 바수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공포(恐怖) 혹은 불안(不安)에 의해서 희망을 자극(刺戟)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확실성은 상상력(imagination)의 확실성과 같은 성실의 것이다. 생성(生成)하는 것의 논리는 고형체(固形體)의 논리와는 다른 것이다.
인생문제 해결의 열쇠는 확실성(確實性)의 새로운 기준(基準)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희망이 무한정(無限定)인 것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한정(限定)하는 힘 그 자체가 되기 위해서이다.
스피노자<Spinoza, Baruch de 네덜란드의 유대계(系) 철학자(1632-77). 범신론(汎神論)을 내세워, 신이 곧 자연임을 주장. 저서로는 ‘윤리학’ ‘신학 정치론’ 등.>말한 것처럼 모든 한정(限定)은 부정인 것이다. 단념할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희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단념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형성(形成)은 단념(斷念)이라고 하는 것이 퀘테가 통달한 깊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지혜였다. 그것은 예술적(藝術的) 창작(創作)에서만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지혜(智慧)인 것이다. //미끼기요시/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