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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노기(怒氣)에 대해서


   Ira Dei<신(神)의 노(怒)>-그리스도교의 문헌을 볼 때마다 언제나 생각나는 것은 이것이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두려운 사상(思想)이다. 또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깊은 사상인 것이다.

 

  신의 노여움은 언제 드러나는 것일까?-정의(正義)가 유린(蹂躪)되었을 때다. 노(怒)하는 신(神)은 정의 신(神)이다.

 

   신의 노여움은 어떻게 나타날까?-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예언자(豫言者)의 노기로 드러나는 것인가? 또는 대중(大衆)의 노여움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신의 노여움을 생각하자!

 

   그렇다면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노(怒)하는 신(神)은 숨어계신 신(神)이다. 정의(正義)의 법칙(法則)으로 따져본다면 인간에게는 신의 노여움은 잊고 말았다. 노기(怒氣)는 계시(啓示)의 한 형식(形式)이다. 성 내는 신은 법칙(法則)의 신(神)은 아니다.

 

   노하는 신에는 디모닛슈 <독dämonisch악마적.초인간적. 초자연적>적인 데가 없어서는 안 된다. 신은 원래 데모닛슈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신은 인간적으로 되어 진다. 악마<demon귀신. 악마. 악령(惡靈)>도 또한 인간적으로 되어있다. 휴머니즘[humanism 인도주의. 인간주의.]이란 것은 노여움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의 휴머니즘에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랑의 신은 인간을 인간적으로 되게 했다. 그것이 사랑의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이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되었을 때 필요한 것은 노기였고, 신이 노여움을 알기에 이르렀다.

 

   오늘 날 사랑에 관해서는 누구나가 말하지만, 누군가가 노기(怒氣)에 대해서 진지(眞摯)하게 말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노여움의 의미를 잊고서 단지 사랑에 대해서만 말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인간이 무성격(無性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간절(懇切)하게 의인(義人)을 생각해본다. 의인(義人)이란 무엇인가?---노기(怒氣)를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 노여움의 윤리적(倫理的) 의미(意味)만큼 많이 잊어지고 있는 것은 없다. 노기는 그저 피할 수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가 모든 경우에 피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움이지 성내는 것은 아니다. 미움도 노여움에서 직접 나타난 경우에는 그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노기는 미움의 윤리(倫理)성에 기초로 하여 묶여 지는 것이다. 노여움과 미움은 본질적(本質的)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자주 혼돈되고 있다.---노여움의 의미가 잊어지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여움은 보다 심오(深奧)한 것이다. 노여움은 미움의 직접적(直接的)인 원인(原因)으로 되는 반면, 미움은 그저 부대(附帶)적인 것으로밖에 노여움의 원인으로 되지 못한다.

 

   모든 노여움은 돌발적(突發的)이다. 그것은 노여움의 순수성(純粹性) 또는 단순(單純)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미움은 거의 모든 것이 습관적(習慣的)인 것이어서 습관적으로 영속된 미음만이 미움으로 생각할 정도다. 미움의 습관성이 그의 자연성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노여움의 돌발성은 그의 정신(精神)성을 드러내고 있다. 노여움이 돌발적(突發的)이라고 하는 것은 그 계시적(啓示的)인 깊이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이 어떤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미움이 습관적인 영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여움만치 정확한 판단을 흐트러뜨리는 것은 없다고 일컫는 것은 옳은 것이리라. 하지만 성난 인간은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미움을 갖는 사람보다 언제나 용서 받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사랑에도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사랑은 신(神)의사랑(그리스어agapē아가페), 이상(理想)에 대한 사랑(프라톤 적 에로스), 그리고 육체적(肉體的)인 사랑. 이렇게 세 가지 단계로 구별되어있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相應)해서 노여움에도 신(神)의 노여움, 명예심(名譽心)에서의 노여움, 기분적(氣分的)인 노여움의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노여움이 단계로 생각된다고 하는 것은 노여움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미움에서도 같은 모양의 단계로 구분이 되는가? 노여움이 내면(內面)성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사랑과 미움을 언제나 대립적(對立的)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계적(機械的)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신의 변증법(辨證法)은 사랑과 미움의 변증법이 아니고 사랑과 노여움의 변증법이다. 신은 미움을 모르고 노여움을 알고 있다. 신의 노여움을 잊은 많은 사랑의 변설(辨說)은 신의 사랑까지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들이 드러내는 노여움의 많은 부분은 기분적(氣分的)인 것이다. 기분적인 것에는 생리적(生理的)인 것과 관련이 있음으로 노여움을 진정하기 위해서는 생리적인 수단에 호소(呼訴)하기가 쉽다. 일반적으로 생리(生理)는 도덕(道德)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옛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잘 실행(實行)하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지혜(智慧)는 점차로 줄어지고 있는 것이다. 생리학(生理學)이 없는 윤리학(倫理學)은 육체(肉體)를 갖지 않은 인간과 같으므로 해서 추상적(抽象的)이다. 그 생리학은 하나의 기술로서 체조(體操)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체조는 신체의 운동에서 바른 판단(判斷)을 지배(支配)하고 그에 의해서 정신의 무질서(無秩序)도 조절(調節)하게 되는 것이다. 정념<情念: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의 활동에만 의존하려고 하는 신체에 대해서 적당한 체조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정념(情念)을 지배(支配)하는 데에는 긴요(緊要)하다 하겠다.

 

   노기를 진정시키는 최상의 수단은 시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노기(怒氣)가 특히 돌발적(突發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神)은 시간(時間)에 비참(悲慘)한 인간을 어루만지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인간을 구(救)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에 의해서 위안을 얻는 다는 것은 덧없는 인간의 일반(一般)에 속하는 것이다. 시간이란 소멸성인 것이다.

 

  우리들 노기의 대부분은 신경(神經)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을 초조(焦燥)하게 하는 원인(原因)이 되는 것, 예를 들면 베고픔이나 수면부족 같은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소한 어떤 것도 그 사소한 것이 이러나지 않도록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일단 일어나면 한없이 큰 화(禍)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

 

   사회와 문화의 현상(現狀)은 인간을 심하게 신경질적으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노기도 상습적으로 되고, 상습적으로 됨으로써 해서 노기는 본래의 성질을 잃으려고 한다. 노기(怒氣)와 초조(焦燥)가 끊임없이 뒤섞인다. 같은 이유에서 오늘날에는 노여움과 미움과의 구별도 애매해졌다. 노한 사람을 볼 때 나는 무언가 고풍스런 사람을 만난 것처럼 느낀다.

 

   노여움은 복수심(復讐心)으로써 영속(永續)될 수 가 있다. 복수심은 미움의 틀을 가진 노여움이다. 그러나 노여움이 영속(永續)할 경우에는 그 순수성(純粹性)을 지켜가기가 어렵다. 노여움에서 일어난 복수심도 단순한 미움으로 바뀌고 마는 것이 거의 일상인 것이다.

 

   육욕(肉慾)적인 사랑도 영속될 경우 점차 정화(淨化)되어서 보다 고차적(高次的)인 사랑으로 높아질 수가 있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것의 신비가 있다. 사랑의 길은 상승(上昇)의 길인 것이다. 이것이 휴머니즘<humanism:인도주의. 인간주의>의 관념(觀念)과 일치하기 쉽다. 모든 휴머니즘의 밑바탕에는 에로티시즘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여움에 있어서는 영속됨으로 해서 보다 높은 노여움으로 높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만큼 깊게, 신(神)의 노기(怒氣)라고 하는 신비(神秘)가 느껴지는 것이다. 노기에는 단지 내리막길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것만으로 노기의 근원의 깊이를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하나이고 융합(融合)되어있으며 영속적(永續的)이지만 노기(怒氣)는 분리(分離)되어 있어서 독립(獨立)되어있고 비영속적(非永續的)이다. 신(神)의 노여움을 생각하지 않는 신의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과의 구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유다 예언자(豫言者) 없이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구약(舊約) 없이 신약(新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느님조차 자기가 독립적 인격이란 것을 노여움에 의해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노여움은 명예심에서 울어나는 노여움인데, 명예심은 개인의 의식(意識)과 불가분(不可分)인 것이다. 노여움에서 인간은 무의식적(無意識的)일수록 자기가 개인이란 것, 독립적 인격이란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노여움의 윤리적(倫理的)의미(意味)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 노여움이란 것이 애매해진 것은 이 사회에서 명예심과 허영심과의 구별이 애매해졌다는 사정(事情)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이 사회에서 무성격(無性格)인 인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노하는 인간은 적어도 성격적(性格的)인 것이다.

 

   사람은 경멸(輕蔑)되었다고 생각될 때 무엇보다 성을 잘 낸다. 때문에 자신(自信)이 있는 사람은 성을 잘 내지 않는다. 그의 명예심은 그의 노여움의 급한 성미를 누르리라. 정말로 자신(自信)이 있는 사람은 조용하지만 위엄(威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완성된 성격(性格)인 것이다.

 

   상대의 노여움을 자기 마음으로 피한다며 자기의 우월(優越)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럴 때,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면 할수록 상대는 다시 경멸당하는 것을 느껴서 그 노여움은 커진다. 정말로 자신(自信)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려하지 않을 것이다.

 

  노여움을 피(避)는 최상의 수단은 기지(機智)인 것이다. 노여움에는 어딘가 귀족주의적(貴族主義的)인 데가 있다. 선의(善意)에서건 악의(惡意)에서건 그렇다.

 

  고독(孤獨)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노여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라고 하는 하나의 지적(知的)성질(性質)은 그리스인의 모든 휴부리즈<hubris:지나친 자신감. 교만(驕慢).오만. -그리스 비극에서- 천벌을 받아야 할 정도의 신에 대한 불손>에 대응한다.


   그리스사람의 휴부리즈는 그들의 성내기 쉬운 성질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심과 허영심과의 구별이 애매해지고 노여움의 의미가 애매해진 오늘에 와서는, 예를 들어 아이로니가 엷어지지 않았다 하드래도, 적어도 그 효용(效用)의 대부분을 잃었다.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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