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찾기(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외통 인생론노트 찾기

개성(個性) / 여행(旅行) / 희망(希望) / 오락(娛樂) / 위선(僞善) / 가설(假說) / 감상(感傷) / 질서(秩序) / 건강(健康) / 이기주의(利己主義) / 소문(所聞) / 명상(瞑想) / 성공(成功) / 질투(嫉妬) / 고독(孤獨) / 인간조건(人間條件) / 노기(怒氣) / 명예(名譽) / 허영(虛榮) / 습관(習慣) / 회의(懷疑) /  행복(幸福) / 죽음(死亡) / 외통인생/

인생론 노트

질서(秩序)에 대해서


   예를 들어서 처음으로 온 가정부에게 자기의 서재(書齋)를 청소하도록 맡겼다고 하자. 그녀는 책상 위나 그 주위에 난잡하게 흩어진 책과 문서와 문구들을 정돈해서 깔끔히 가지런히 해 놓을 것이다. 그러고 그녀는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책상을 마주 보고 일하려고 할 때, 무언가 이상하게 낯설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지 못함을 느껴진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사이에 말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가 온통 흐트러져서 원래처럼 난잡하게 만들어지고 만다.

 

   이것은 질서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단순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잘 정돈 정리된 것이 반드시 질서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기에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데 오히려 질서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질서란 것은 마음의 질서와 관계된 것이 분명하다. 어떠한 외적인 질서도 마음의 질서와 합치되지 않는 한 진정한 질서는 아닌 것이다. 마음의 질서를 도외시(度外視)한 어떤 외면적(外面的)인 질서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뚜렷한 내용이 없이 그저 어색할 뿐이다.

 

   질서는 생명을 이어가는 원리인 것이다. 거기에는 늘 따뜻한 온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이 따뜻한 온기로 그 생명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또 질서는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단하게 잘라버리거나 주어 냄으로써만 질서가 잡히는 것은 아니다. 허무(虛無)는 분명히 질서와는 반대인 것이다.

 

   하지만 질서는 언제나 경제적인 것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效用)을 얻어내야 하는 경제적 원칙은 질서의 원칙도 되는 것이다. 이는 극히 손쉬운 방법에 의해서 증명된다. 절약-보통의 경제적인 의미로서의-은 질서를 존중하는 하나의 형식인데, 이 경우 절약은 하나의 큰 교양(敎養)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경건(敬虔)함마저 자아내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절약은 질서(秩序)숭배(崇拜)의 하나의 형식이라고 하는 의미에서마저 윤리적인 의미조차 갖고 있는 것이다. 무질서는 많은 경우에 낭비(浪費)에서 온다. 이는 마음의 질서에 관계되며 금전적(金錢的)인 남비(濫費)에서는 어김없이, 늘 그렇다.

 

   사간을 잘 이용한다는 것은 질서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가치를 얻는다고 하는 경제의 법칙이 동시에 마음의 질서의 법칙도 되는 것이라고 함은 이 경제의 법칙이 실은 미학(美學)의 법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학의 법칙은 정치상의 질서에 관해서조차 모범적으로 되는 것이다. ‘시대의 정치적 문제는 미학에 의해서 해결된다.’고 한 시루렐의 말은 무엇보다 질서문제에 대해서는 타당한 말이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능력은 기술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질서에서, 마음의 질서도 기술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理解)해야 할 뿐만 아니라, 능력으로써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얻는다고 하는 경제의 법칙은 실은 경제적 법칙이라기보다는 기술적 법칙인 것이고, 이런 관계로 해서 이것을 미학의 범주(範疇)에도 집어넣는 것이다.

 

   플라톤에서의 소크라테스는 덕(德)은 마음의 질서라고 하고 있다. 이것보다 구체적(具體的)이고 실증적(實證的)인 덕(德)의 규정은 없다. 오늘날 무엇보다 잊혀져가는 것은 덕(德)에 대한 이런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덕은 마음의 질서라고 하는 정의의 논증(論證)에서 소크라테스가 쓴 방법에 주의하여야 할 것은 건축(建築)술, 조선(造船)술등, 모든 기술의 비론(比論)이었다. 이것은 비교(比較)이론(理論)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실체(實體)성이 없는 데 대해서 어떻게 기술(技術)이란 것이 가능할까! 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이렉트론(electron:전자電子)설 이래 물질(物質)이라는 것에서 물체성(物體性)을 앗아버렸다. 이 설(說)은 전 물질계(全物質界)를 완전히 실체성(實體性)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우리는 ‘실체(實體)’의 개념(槪念)을 피하여 이것을 ‘작용(作用)’의 개념으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수학적(數學的)으로 기술(記述)된 물질은 모든 일상적인 친근(親近)감을 잃어 버렸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은 이 물질관(物質觀)의 변혁(變革)에 상응(相應)하는 변혁이 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의 마음속에 준비되어 실현되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심리-반드시 현존하는 심리학을 말하지 않는다.-와 현대물리학과의 평행(平行)을 비평적(批評的)으로 밝히는 것이 새로운 윤리학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것은 원시적인 의미에서는 물건(事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지식인의 이런 원시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메로스<Homeros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B.C. 8세기경). 그리스 최고(最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작자로 알려져 있음. *영어명은 Homer(호머).>의 영웅들은 자기들이 수공업(手工業)을 했다. 에우마이오스 <에우마이오스 Eumaeos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성스런 하인>는 자기가 가죽을 재단(裁斷)해서 의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둣세우스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목공(木工)장인(匠人)으로 손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리들에게 이것은 선망(羨望)에 버금가는 값어치가 있다 할 것이 아닌가?!

 

   도덕(道德)에도 수공업적인 것이 있어서, 이것이 도덕의 기초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오늘날의 물적(物的)인 기술에 있어서 ‘도구(道具)’의 기술에서 ‘기계’의 기술로 변화되었듯이 도덕의 영역(領域)에서도 큰 변혁(變革)이 요구(要求)된다는 데 있다.

 

   만듦(作)으로써 알(知)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근대 과학에 미쳐야 할 실증적(實證的)정신이고, 도덕도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실증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Platon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427-347 B.C.).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아테네 교외에 학교를 설치하여 아카데미아 학파를 창설. 저서에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국가’ 등 약 30편의 ‘대화편(對話編)’이 있음.>이 이 마음의 질서에 상응하는 국가의 질서를 생각한 것은 기이한 것은 아니다. 이 구상에는 깊은 지혜가 내포되어 있다.

 

   모든 질서에서 구상(構想)의 근저(根柢)에는 가치(價値)체계가 설정(設定)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오늘의 유행(流行)은 새 질서(秩序)론의 기초에 어떤 가치체계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윤리학조차 오늘날에 와서는 가치체계의 설정을 던져버리고, 더욱이 교활하게도 태연하게 있는 것이다.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독일의 철학자(1844-1900).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으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인 형이상학으로 구축함. 이에서 출발하여 ‘반시대적인 고찰’로 시대의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여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으며,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한층 분명해지고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으로 치고 새로운 이상에 대한 가치 전환을 기도함. >가 일체의 가치는 전환(轉換)한다고 주창한 이후 아직 승인(承認)된 어떠한 가치체계도 아직은 없다. 그 뒤 신질서의 설정은 늘 아무런 독재적(獨裁的)인 틀을 갖추지 못하였다. 일체의 가치는 전환한다는 니체의 사상, 거기에 실은 근대사회와 간신히 닿은 가치의 무질서<anarchy>가 표현된 것이었다. 근대의 데모크라시는 내면적으로는 모든 가치가 - 다신론에서 무신론까지- 즉 허무주의에 빠져드는 위험이 있었다. 이것을 무엇보다 깊이 이해한 이가 니체였다. 그래서 이런 허무주의, 내면적인 무질서야 말로 독재정치의 지반(地盤)이 되었다. 만약 독재를 원하지 않으려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바로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 국가의 많은 지식층은 독재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어떻든 니힐리즘(허무주의)에서 탈출하질 못하고 있다.

 

   외적 질서는 강력한 힘으로 만들어 잡을 수가 있지만, 마음의 질서는 힘만으로는 만들 수가 없다.

 

   인격이란 질서인 것이다. 자유라는 것도 질서인 것이다. ....이런 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이해될 때에 주관주의(主觀主義)는 불충분(不充分)하게 되면서 어떤 객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근대의 주관주의(主觀主義)는 질서의 사상의 상실(喪失)로 인해서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졌다. 모든 무(無)의 철학도, 질서의 사상, 특히 가치(價値)체계의 설정 없이는 그 절대주의(絶對主義)의 허무주의(虛無主義)와 한통속이 될 위험이 크다. 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