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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健康)에 대해서

 

   무엇이 나를 위해주고 무엇이 나를 해롭게 하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의 관찰이 건강을 지키는 최상의 물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물리학의 규칙을 넘어선 지혜가 있다.

 

 

   여기에 프랜시스 베이컨 [ Francis Bacon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인간의 정신능력 구분에 따라서 학문을 역사 ·시학 ·철학으로 구분했다. 다시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누었다.]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극히 중요한 양생훈(養生訓:攝生訓)이며, 더욱이 그 밑바탕에는 건강은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단순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경건(敬虔)하기까지 한 진리인 것이 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건강을 대신 할 수는 없다. 또 누구도 내 몸을 대신으로 건강하게 할 수가 없다. 건강은 오로지 각각의 몫이다. 해서 진정으로 이점에서만은 평등한 것이다. 여기서 어쩌면 어떤 종교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모든 양생훈(養生訓)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안 된다.

 

 

   풍채나 기질이나 재능에서는 사람마다 개성이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찬가지로 건강도 온전히 개성적인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일까! 이 경우 사람들은 그저 괜찮거나 아니면 허약하다는 정도의, 지극히 일반적인 판단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애나 결혼이나 또는 교제에 있어서는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보다 중요한 하나의 요소는 바로 각자의 건강과 관련한 극히 개성적인 것이 된다. 생리적친화성(生理的親和性)은 심리적친화성(心理的親和性)에 못 미치는 미묘한 것으로써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은 이것에 마음 쓰지 않는다. 하지만 본능이 그들을 위해서 선택해 나가는 것이다.

 

 

   이같이 건강이 개성적이라고 한다면 건강에 관한 규칙은 인간적 개성에 관한 규칙과 다를 수 없을 것이지 않겠는가! - 즉, 우선 자기의 개성을 찾아낼 것과, 자기 개성에 충실하면서 그 개성을 형성(形成)해 나갈 것이다. 또는 생리학의 규칙은 심리학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되고 거꾸로 심리학의 규칙은 생리학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생(養生)론의 바탕에는 전자연철학(全自然哲學)이 있다. 이것은 이전에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자연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의학이나 생리학인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자연철학과 근대과학과의 차이는 후(後)자는 궁박감(窮迫感)에서 나오는데 반해서 전(前)자는 소유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명은 궁박(窮迫)감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후자가 발명(發明)적인데 반해서 전자는 발견적(發見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의학은 건강의 궁박(窮迫)감에서거나 그런 의미의 병인가 하는데서 생겨났다. 그런데도 이전의 양생(養生)론에 있어서는 소유된 것처럼 된 건강에서 이루어져서, 어떻게 해야 이 자연적인 것을 형성함으로서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건강은 발명되지 않은 병을 발명하도록 한다.

 

 

   건강문제가 인간적(人間的)자연의 문제인 것이라고 함은 단순한 신체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건강에는 신체 각부의 고른 발육, 건강 증진, 체력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일정한 규칙에 따른 운동인 신체의 체조(體操)와 함께 비슷한 정신의 체조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몸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인해서 나의 사상(思想)이 변화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想像)의 병은 실제(實際)의 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내 가정(假定)이 그 다른 모든 것의 질서를 흐트러뜨릴 수는 없지만, 내 몸은 내가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 내 몸에 관한 공포를 멀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포(恐怖)는 효과(效果)없는 동요(動搖)만을 일으킬 뿐이고, 그런 걱정과 근심은 언제나 두려움을 더할 뿐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파멸되었다고 생각하다가도 일단 무엇인가 긴급한 일이 일어나면 자기의 생명이 안전(安全)하다는 것을 겪어보았다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자연에 순응하라고 하는 것이 건강법 공리(公理)인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 말의 의미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깊이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곧, 자연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개별적(個別的)인 것이다. 또 자기형성적(自己形成的)인 것이다. 자연에 순응한다고 하는 것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이다.-모방(模倣)의 사상(思想)은 근대적인 발명의 사상(思想)과는 다르다.-그 이(利)로움이란 쓸데없는 불안을 털어내고 평안함을 준다는 도덕적효과(道德的効果)에 있는 것이다.

 

 

   건강은 사물(事物)의 모양처럼 직관적(直觀的)이고 구체적(具體的)인 것이다.

 

근대 의학이 이처럼 발달한 오늘에도 건강문제는 궁극적(窮極的)으로 자연형이상학(自然形而上學)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그 형이상학이 새로운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의사(醫師)들의 인생은 불양생(不養生)이라고 하는 속설(俗說)은 양생(養生)에 있어서는 의사(醫師)도 형이상학(形而上學)이 필요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인 것은 건강이고 주관적인 것은 병적(病的)인 것이다’고 하는 이 말 속에 담겨져 있는 형이상학(形而上學)에서 사람들은 훌륭한 양생훈(養生訓)을 끄집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건강의 관념에 보다 큰 변화를 준 것은 그리스도교였다. 이 영향은 그 주관성(主觀性)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건강의 철학을 추구(追求)한 니체가 그렇게 그리스도교를 공격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니체자신의 주관주의(主觀主義)는 그가 그처럼 추구한 건강의 철학에 대해서 파괴적(破壞的)인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근대(近代)과학(科學)의 객관주의(客觀主義)는 근대의 주관주의(主觀主義)를 단순히 뒤집어서 바꾸어 놓은 것이므로 이와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관주의가 나타나고서 병(病)이란 관념(觀念)은 독자성(獨自性)을 갖고 고유(固有)의 의미(意味)를 얻은 것이다. 병을 건강의 결핍(缺乏)이라고 하기보다 적극적 의미(積極的意味)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근대주의(近代主義)가 달려서 다다른 곳이 인격의 분해(分解)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요하게 된 것은 건강의 관념이 마찬가지로 분열(分裂)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근대인은 어느새 건강의 완전한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 근대인들의 불행의 커다란 원인이 있다. 어떻게 해서 건강에 대한 완전한 이미지를 되돌릴 것인가가 오늘날의 최대 문제의 하나인 것이다.

 

 

   ‘건강 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없는 것이다’고 니이체는 말했다. 이것은 과학적 판단이 아니고 니이체의 철학을 표명(表明)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다르게, ‘무엇이 일반적(一般的)인 병(病)인가하는 것은 의사의 판단보다는 환자의 판단 또는 그들 나름의 문화권(文化圈)의 지배적인 견해에 의존하는 것이다’고 칼 야스벨스는 말하고 있다. 이토록,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병이나 건강은 존재판단(存在判斷)이 아니고 가치판단(價値判斷)이라고 하면 이는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니 경험적(經驗的)인 존재관념(存在觀念)으로서는 평균(平均)이라는 것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평균적인 건강에 있어서 말한다면, 사람마다의 개성적인 건강에서는 어떤 본질적(本質的)인 것도 파악(把握)할 수가 없다. 또 건강이 목적론적(目的論的)개념이라고 한다면 그에 따라서 바로 과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겠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자연철학(自然哲學)이나 혹은 자연형이상학(自然形而上學)이 사라졌다는 것이 이 시대에 이처럼 건강을 잃어가는 한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과학적(科學的)시대에서도 질병에 관해서만은 이처럼 많은 미신(迷信)이 있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건강에 관한 많은 기록이나 기술(記述)들은 언제나 무언가 모를 형이상학적 원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에 변화(變化)를 주어서 그 반대의 것으로 바꾸어 본다면 알 것이다. 차분히, 조용하게, 지극히 좋은 감정으로 절식(絶食)과 포식(飽食)을 해보자. 그러면 오히려 포식(飽食)을 하게 될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과 자는 것을 해본다면, 눈을 감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잠을 자게 된다. 또 같은 방법으로, 앉아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다는 오히려 움직이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형이상학적사고(形而上學思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단 하나인 것을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나인 것보다는 많은 것을 바꾸는 것이 이 보다 안전한 것이다.-이것도 하나의 형이상학적원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건강(健康)이란 평화(平和: 平穩)와 같다. 여기에 그토록 많은 종류(種類)가 있고, 그토록 많은 가치(價値)의 서로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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