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give and take의 원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이기주의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지극히 드물다. 대체로 어느 누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기만 할 유덕(有德)자거나 혹은 유력자(有力者) 일 것인가! 뒤집어 보아 말하면 대체로 누가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는 유력자 아니면 유덕자일 것인가! 순수한 영웅주의(英雄主義)가 드문 것처럼 순수한 이기주의(利己主義)도 또한 드문 것이다.
우리들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give and take의 원리는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의식(意識)하지 못하면서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의식적이지 않고는 순수한 이기주의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기주의자가 언짢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이기보다는 그가 의식적(意識的)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기주의자를 고통 주는 것은 그의 상대(相對)가 아니고 그의 자의식(自意識)인 것이다.
이기주의자는 원칙적(原則的)인 인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식적(意識的)인 인간이기 때문이다.-사람은 습관(習慣)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기주의자로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명제 즉 앞의 명제와도 어긋나고 또 서로 모순(矛盾)되는 명제(命題) 속에 인간의 힘과 무력이 말로 표현 된는 것이다.
보편적인 우리들 생활이 주고받기의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는 반감(反感)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인생에서 실증적(實證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내고 있다.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조차 거의 모두가 상상(想像)에 의한 것이다. 더욱이 이기주의자로 되는 요건(要件)은 상상력(想像力)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기주의자가 비정(非情)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가 애정이나 동정심이 없어서라기보다도 그의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상력은 인생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인간은 이성(理性)에 의해서보다는 상상력(想像力)으로 해서 동물과 구별된다. 애정조차도 상상력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애정(愛情)은 상상력(想像力)에 의해서 계량(計量)되는 것이다. 실증주의는 본질적으로 비정(非情)하다. 실증주의(實證主義)의 끝이 허무주의(虛無主義)인 것은 그래서 당연(當然)한 것이다.
이기주의자는 어중간한 실증주의자다. 더하여 자각(自覺)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利己的)란 것과 실증적(實證的)이란 것은 종종 슬쩍 바뀌기도 한다. 하나는 자기변해(自己辨解)를 위해서, 또 다르게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서다.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give and take의 원칙은 기대(期待)의 원칙인 것이다. 줄 때는 받을 것을, 받을 때는 줄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대(期待)의 원칙으로서 결정론(決定論)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확률적(確率的)인 것이다. 이렇듯 인생은 개연적(蓋然的)인 것 위에 서 있다. 인생에서는 개연적(蓋然的)인 것이 확실(確實)한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기대(期待:바램)위에 성립(成立)되어 있는 것이다.기대(期待)란 다른 사람의 행위를 구속하는 마술적인 힘도 갖고 있어서, 우리들의 행위는 끊임없이 그 주술(呪術) 같은 것에 묶여있는 것이다. 도덕(道德)의 구속력(拘束力)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期待)에 거꾸로 행동한다는 것을 생각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기대에 전적으로 등 돌린 행동도 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바라는 바와 같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마침내 자기를 찾아내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수재(秀才)라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으로 마치는 것은 그 한 예이다.
이기주의자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용(信用)하지도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시기심(猜忌心)과 의심(疑心)에 쌓여 고통 받는 것이다.
give and take의 원칙을 기대의 원칙으로 하지 않고 타산(打算)의 원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기주의자인 것이다.
인간이 이기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가 받으려고 하는 시기(時期)를 어느 정도의 먼 장래로 늘이느냐는 것으로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적인 문제는 역시 간단한 타산의 문제가 아니고 기대의 문제인 상상력의 문제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죽은 다음에 기대하는 사람은 종교적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칸트<Kant, Immanuel독일의 철학자(1724-1804). 영국의 경험주의,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독일의 관념론과의 대결에서, 비판주의의 입장에 선 독일의 고전철학을 집대성했음. 저서에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등이 있음.>의 신(神)의 존재증명(存在證明)의 요약(要約)이다.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는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암묵적(暗黙的)으로 전제(前提)한다. 만약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기주의도 성립되지 않을 까닭이기에 이기주의자의 오산은 그 차이가 단지 셈을 위한 기한(期限)의 문제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그의 상상력이 모자란다는 증거(證據)와 다름없다.
이기주의자는 자기는 온전하게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공언(公言)하는가 하면 자랑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이지(理智)의 한계(限界)가 상상력의 결핍(缺乏)에 있음을 이해(理解)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은 상상력이 없는 합리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사회의 기초는 마술적(魔術的)인 구속력(拘束力)위에 세워진 건물인 것이다.
어떤 이기주의자라도 자기의 특수적인 이익을 일반적인 이익처럼 주장한다.-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이론이 만들어 지고 있는가!-그에 반해서 사랑과 종교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명백하게 자기를 주장한다. 이들은 그들의 이론(理論)을 경멸(輕蔑)하는 것이다.
이기주의(利己主義)라는 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공격(攻擊)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주의(主義)라고 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이르는 것이 아니고 반대자(反對者)로부터 붙여지는 것이라고 하는, 보다 일상적(日常的)인 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끼기요시/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