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가 숲에서 매미를 잡고 있는 곱추를 만났다. 그는 떨어진 물건 줍듯 매미를 쉽게 잡았다. "방법이 있습니까?" "매미에게만 집중합니다. 매미를 잡을 때의 몸놀림은 마치 나무 등걸 같고, 팔은 고목 가지 같지요. 나는 꼼짝도 않고 몰입해서 천하 만물로 매미 날개와 바꾸지 않습니다." 장자(莊子) '달생(達生)'편에 나온다. 그의 말을 들은 공자가 감탄했다. "뜻 쓰기를 나누지 않아야만 정신이 한곳에 모인다(用志不分, 乃凝於神)." '응(凝)'은 똘똘 뭉쳐 응축된 상태다.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흩지 않고, 오로지 한곳에 정신을 집중한 상태가 응신(凝神)이다.
송나라 진백(陳柏)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서 말했다. "일이 생겨 응대할 땐 행동으로 증명한다. 밝은 천명 환하거니 눈을 거기 둬야 하리. 일에 응해 마치고선 나는 전과 같이 되네. 마음은 담박하고 정신 엉겨 생각 멎네(事至斯應, 則驗于爲. 明命赫然, 常目在之. 事應旣已, 我則如故. 方寸澹然, 凝神息慮)."
응신식려! 정신을 한곳에 응축시켜 일체의 다른 생각을 멈춘 상태다. 날마다 생각지 않은 일이 생긴다. 귀찮아도 그때마다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눈길이 언제나 천명(天命)을 향하니 가야 할 길이 분명하고 환하다. 일 처리를 마쳤으면 다시 제자리로 몸과 마음을 돌려놓는다. 마음은 맑게 비우고, 정신을 한곳에 모아서 나를 짓누르는 온갖 생각들을 잠재운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대루원(待漏院)' 시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신 모아 바로 앉아 수판(手板)에다 턱을 괴니, 온갖 생각 환하게 마음으로 들어온다. 선악의 기미가 단지 잠깐 사이건만, 천하는 이것으로 경중을 가린다네(凝神端坐柱手板, 百慮皎皎來襟靈. 善惡之幾只抄忽, 天下以之爲 重輕)." 응신단좌(凝神端坐), 정신을 한데 모아 반듯한 자세로 앉으면 마음 위로 떠다니던 온갖 생각의 실체가 환하게 드러난다. 할 일인지 해서는 안 될 일인지가 그 안에서 다 판별된다. 갈 길인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 그 사이에 다 보인다. 정신이 흩어지면 선악의 판단이 흐려지고, 이 판단을 놓치면 천하가 그를 우습게 본다. 응축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