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보는 눈은 각자 다르다.
신문의 미술평론을 읽으면서 감상하다보면 이런 그림은 어릴 때 나도 많이 그렸는데? 하고 생각한다.
내 어릴 때 크레용의 색은 열 두색, 크레파스 색은 스물네 색이었지만 일 년에 한 통식 사서 그 중 삼원색을 다 쓰고 날 때까지 나머지 색의 자루는 언제나 새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공간을 어떤 색이라도 칠했더라면. 눈에 보이는 자연 색만을 왜 고집했을까? 상상력의 부족 탓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보다는 늘 물건을 아끼는 습성이 크레용 사용에도 이렇게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왜 크레용의 갖가지 색을 남겨두고 늘 도화지는 채워지지 않고 사방이 비어있는지. 그리고 싶은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여느 공간의 색은 무시됐을 것 같은 지금의 생각이지만 아쉽기 그지없다.
지금 같으면 아마도 도화지 가득 채워 그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내 꿈도 제한됐었을까? 환경의 탓일까? 내재하는 본연의 연상 탓일까? 지금은 안 그렇다. 많은 세월이 흐른탓이리라. 이제는 사색(思索)의 색갈이 넉넉해졌을성 싶다.
다시 그리고 싶은 어릴 적 고향의 철길 건널목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전경을 빨간 홍시 달린 감나무와 울 밖의 닭을 스물네 색의 크레파스로 가득 메우고 싶다.
그러나 이제 그린들, 나는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닌 것이 또한 더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갈 수도 없는 그 곳, 아서라 그만두자!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