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려진 개숫물이 알아볼 수 없는 지도를 그리며 마당을 얼려 놓았다.
얼음은 아침볕을 받아서 번쩍이며 꼬마들의 미끄럼을 부추긴다.
초겨울의 햇볕은 얼음을 녹일 만치 아직 떠오르질 못했다.
거리라기엔 어울리지 않게 초가가 너무 많다.
‘신작로’를 따라서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선 전봇대와 이 전봇대를 잇는 전깃줄과 전화선이 그런대로 잘 어울리어 시골의 장터를 알아보게 한다. 제비 떼가 전깃줄 가득히 앉아서 남쪽을 바라보며 깃을 다듬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초겨울이 다가왔다.
전깃줄은 텅 비어서 하늘로 말려 올라갈 듯하다.
집집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문틈으로 김이 솔솔 새 나오고 김을 따라 나온 ‘시래깃국’ 냄새가 생선 굽는 내를 제치고 바람 따라 빈 신작로를 오르내리며 이웃의 콧구멍을 즐겨주는, 이른 아침이다.
곧은 신작로를 따라서 양쪽으로 나란히 뻗은 길가 개울은 우리 동네의 명물이고 자랑거리가 돼서 인근의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인공 도랑이지만 그 실은 마을 아래쪽 논으로 가는 봇도랑 물이다. 한겨울이니 마을 끝에 가서 이 봇물은 옆으로 빠져 바다로 흘러가리라.
여름에는 먼지를 재우는 물 뿌리는 수원(水源)인데 뉘 집이든지 자기 집 앞 도로는 으레 이 물로 적셔서 먼지를 없앤다. 밤에는 이 물소리가 자장가로 변한다. 낮으로는 집집의 허드렛물 구실을 하면서, 화단을 가꾸며 물을 주는 긴요한 수로다. 어린이들의 물놀이가 있고 고기잡이 극성도 있는, 잘 다듬어진 인공수로다. 다듬은 돌로 도랑 바닥과 양옆을 깔고 쌓아서 자연미가 돋보이는, 이곳 수로의 살얼음은 물밑을 더욱 잘 드러낸다. 수경을 깐 듯 맑게 보인다.
길가의 집들은 모두 신작로를 향해서 나란히 늘여서 지었다. 간혹 새집을 마련하지 못한 집이 있어서 거리는 이 빠진 개구쟁이 앞니 같다. 이 집들은 모로 혹은 비슷이 엉덩이를 내밀고 있다. 이 집들이 우리 마을을 한결 예스럽고 정겹게 하고 포근한 시골 농촌임을 말해준다.
시골 ‘저자’, 거리는 장사하는 집이 길가로만 늘어있고 이 집들은 어느 집이나 옥호나 업을 알리는 표지(標識)가 없다. 간판은 물론이고 별다른 광고나 알림판이 없어도 장사는 잘도 한다. 그러니까 떡집은 떡 내 나고, 기름집은 고소하고, 국수 파는 집은 국수틀을 보이고, 주단 집은 주단을 펴서 진열하면 된다. 이발소도, 잡화상도, 고물상인 엿 방도, 대장간도, 간판이 없다.
이들이 현대적 공산품을 취급하느냐 재래식 수공품을 만들어 취급하느냐 가름하는 기준은 오직 비 가리게 유리문이 점포의 앞을 가려 차렸느냐 아니냐가 판가름한다.
이렇듯이 집마다 문을 닫아버리면 그 집 앞에 가서 보기 전에는 그 집이 무엇을 팔며 무엇을 하는가를 가늠할 수 없다.
장터거리의 양지바른 곳에 늘어선 초가집의 처마가 맞닿아 있다. 양지쪽 길 갓집은 학교 앞까지 죽 늘어서 있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면 으레 신작로 길을 건너서 이 양지쪽의 처마 밑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학교 앞까지는 눈비를 피해서 다닐 수 있는, 처마 밑 학교길이 되고 있다.
넓은 장터의 길가 남향집, 통나무 판자 부엌문이 닫혀있고 그 틈새로 하얀 김이 빠져나와 부엌문 앞은 언제나 번질거린다. 툇마루는 하얗게 바래서 솔 옹이와 나이테만 튀어나왔고 널 이음새가 틈 벌려 바닥이 들여다보인다. 오래되고 낡은 집이지만 이 집 부엌에는 소여물을 끓이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있다. 그 위에 국수틀을 얹어서 언제나 끓는 물에 국수가 빠져드는, 쉬는 날 없는 국수를 파는 집이다.
해가 아직은 낮게 멀리 있어서 맞은편 길 건너의 지붕 그늘을 제치려면 한참은 더 하늘 높이 떠야 한다. 창호지 문과 부엌문을 꽁꽁 닫아 놓아야 하는 전통 농가의 마당, 마당들이다.
우리야 허구한 날을 지나다니니 이 집이 국수 파는 집인 줄 안다마는, 외지에서 온 장꾼들은 농가인 이 집이 장삿집인 걸 알 턱이 없을 것인즉, 기발한 광고술을 들어내는 것이다.
큰 문어가 삶겨 처마에 매달려, 아직 무럭무럭 김을 뿜어낸다. 문어발 끝이 우리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매달려서 오가는 행인에게 이 문어를 보이며 이 집을 장사하는 가게로, 그것도 문어가 들어가는 음식인 것을 알게 하는 초현대식(?) 간판이다. 현대의 모든 조형물간판 중에 이 문어가 효시(?)였음에 틀림이 없다.
전날에, 학교에서 얻어먹은 문어 다리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었다. 내 오늘의 각오(覺悟)를 하게 한 동기이고 부추김이었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집게 칼이 손바닥에 잡히지만 영 마음에 안 들고, 무슨 사고라도 저지를 것 같다. 자르다가 안 잘리면? 그냥 마나? 아니다. 거듭해서 잘라야 한다. 그러다가 들키면? 나는 이웃집의 애니 부모에게 알릴 것이고 선생님에게도 알릴 것이고 드디어 반, 전교생에게 알려져서 명예(?)롭지 못하게 퇴학당할 것이다.
걸음걸이는 계속되어서 어느새 문어 다리가 얼굴을 가리더니 왼쪽 어깨와 손을 스치고 말았다. 실패다. 돌아갈 수는 없다. 모두 자연스럽고 민첩하게, 그냥 학교에 가는 그대로의 걸음걸이에서 조금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날부터 그야말로 칼을 갈기 시작했다. 우선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숫돌에다 문지르고 칼집의 고리못을 돌로 두들겨서 힘이 지게 한 다음, 이 주머니칼로 연필을 깎아보았다. 잘 들었다.
단칼에 잘려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마음 다짐을 하고서는 그래도 못 믿어서 이번에는 집게 칼을 내어 뒤란에 나가서 배나무 가지를 문어 다리로 하여 자른다. 성공이다.
다음날도 추었다. 문도 여전히 닫혀있고 문어는 더 커 보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려고 일부러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만두리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번에는 나의 실험이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궁금하기 시작하더니 칼의 실험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 다졌다. 잘라서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잘라야겠다. 마음먹고 학교 길로 들어섰다. 당연히 책보는 뒤로 어깨에 둘러메기로 했다. 그래야 두 손이 자유로우니까.
이런 모든 생각은 순식간 스쳤다. 문어 다리가 눈앞에 다가오자, 오른쪽의 주머니에서 집게 칼을 내어 펴고 앞으로 냈다. 왼손으로 문어 다리를 주먹 길이만큼 옴켜쥐었다. 문어의 빨판 단추가 손아귀에서 따뜻하다. 칼은 이미 내 엄지손가락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 발걸음엔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왼손 주먹 속에는 내 왼쪽 가슴의 심장이 들려있고, 내 옷깃을 채우는 단추를 걷어 움켜쥐어서 곧 내 옷이 저 절로 벗겨지며 알몸이 되는 것 같다.
먹은들 목구멍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고, 내 왼손은 이제 펼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조막손이 되고 말았다.
정신없이 학교 문 앞까지 갔지만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교문 앞 개울 다리 밑 살얼음 위에 던지고 말았다.
해는 어느새 그늘을 접어서 집안으로 들였다.
문어발의 맛은 여러 가지의 맛으로 느꼈다. 먹는 맛, 두려운 맛, 해보려는 의지의 실현, 가능성의 저울질, 내가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걸 한 뼘 길이 안팎의 문어 다리에서 배웠다.
서울 거리가 공해 없는 거리로 되어서, 시각적 공해인 모든 간판을 없앤다면? 삶은 문어나 삶은 낙지를 간판으로 매달아서 업종을 알릴 터다. 그 집의 옥호(屋號)는 손님들이 지어서 그 집 ‘문설주’에 붙여질 것이고, 그래서 그 집에 장안의 손님이 구름같이 모일 것이란, 헛꿈도 꾸어본다. /외통-
- 선과 악은 한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밝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