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칠한다는 것은 마음을 담는 것이다. 마음이 비어 있었던지, 내 그림은 늘 흰 종이가 색칠한 부분보다 넓었다는 것을, 늙은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도 알기나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누구든지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릴 때만큼은 심취해서 자기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여서 도화지나 바탕 재위에 들어가서 헤매지 않고 그림 밖에서 그림을 멀리서 관조하면서 그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성급해서인지 아니면 관찰력 결여인지 몰라도 그리려고 하는 그림 속에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섰거나 앉아서 그리게 되니까 그림은 늘 원근의 거리감이 없어지고 마치 코앞의 물체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지극히 평면적이고 단순하다.
풍경을 담아도 그렇고 사람을 그려도 마찬가지다. 체계적으로 지도받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받고도 모르는지, 깡통처럼 비어 있어서 그냥 흰 것이 모두인 양, 색칠하는 데 인색하다.
흰 바탕에다 무엇을 그리든지 그 대상이 언제나 한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대상을 그리면 그만이지, 배경의 이미지는 생각 없이 늘 희다.
그래서 내 그림은 언제나 흰 바탕이 그린 그림보다 넓었다. 차라리 색종이 위에 그렸으면 전체의 모양이라도 그럴듯했을 것을 그랬다. 그러나 하나같이 도화지는 흰색이다.
마음의 색이 있어야 밖으로 나타나는 색도 있을 터인데 내겐 마음의 색이 없이 속은 역시 비어 있나 보다. 그래서 내 주위에 흔하게 보이는 녹색과 갈색을 주로 칠하다 보니 크레용은 몇몇 색깔만 닳아서 일직이 폐품이 된다. 얼마나 단순한가를 실증한다.
색은 눈에 보이는 색과 마음의 색이 다를 것인즉 보이는 색 중에도 그리고자 하는 물체의 색만 필요할 뿐 모든 색은 무용지물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는 그림 전부다.
빈약하기 그지없도록 그리니 크레용은 늘 몇 가지 색 빼고는 새것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은 나머지 색깔은 도화지에 색칠함으로써 오히려 그림에 손상이 되는 것으로 알고, 지극히 삼가든 나는 과감하게 칠하는 대담성이 없었던 점을 지금도 아쉬워한다.
그 색이 비록 내 눈에 비치는 사물의 색이 아니라도 내 마음의 색과 여유가 있었던들 태반이 흰색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꽉 찬 그림이 됐을 것이다.
훗날 여러 가지 그림을 대하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림을 그릴 기회는 아직 없다.
그림은 기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담은 글이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린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써 감상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느낌을 말하지만, 그 실 작자의 진솔한 마음을 읽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감상한다 해도 그린 이가 그리기 전에, 그릴 때, 감정에 흐르는 갖가지를 일시로 정지시켜서 표현하는 그 시간의 정체가 장벽으로 싸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무리 못 그리는 사람이라도 의도하는 바를 순간적 정지로,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힘을 다했을 터이니 그림을 보고 잘 그렸느냐 못 그렸느냐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전달 수단이 매끄럽나 거치나 잘 표현했느냐, 많은 부분을 자기의 가슴속에 남긴 채로 겉으로 적게 나타났느냐, 가슴속을 싹싹 슬어서 모두 나타냈느냐, 하는 것의 차이일 뿐, 그림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건 노래로 부르건 시로 쓰건 간에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의지가 그칠 줄 모른다.
이제라도 그 틈바구니에서 크레용의 모든 색을 남김없이 뭉개서, 내 마음은 아낌없이 드러내는, 그래서 나를 있게 하고 내가 살았던 곳, 사는 곳을 마음을 담아 그려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걸 함께 불사르고 싶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