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졸라서 다짐을 받아냈다. 내일 새벽엔 누구보다도 일찍 깨워달라며 신신부탁을 드리고 일찍 잠을 청해 보지만 널려 있는 알밤이 눈에 선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비비며 대문을 나서는 내게, 집 밖을 나설 때마다 꼭 한 마디씩 주시는 할머니의 훈계 말씀이 오늘도 예외 없다.
당부의 말씀은 달린 밤을 따려고 나무나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이다. 남의 것을 축내지 말아야 하고 떨어지는 밤을 보려고 고개를 들 때 떨어지는 밤송이에 맞아서 눈이 멀 수도 있고, 던진 나무나 돌에 다른 사람이 맞아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옳고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떨어지는 밤알에 맞아 보았으면, 하는 게 오늘의 내 심경이고 바람이다. 아직 나는 밤알이 송이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름내 품어 안아서 키우고 살찌운 밤알을 땅 위에 떨어뜨리는 그 순간은 생각만 해도 신비하고 풍요롭고 경이롭다.
많은 이가 땅 위에 있는 밤톨은 보았을망정 떨어지는 순간을, 다시 생각하면, 아람이 밤송이에서 이탈하는 과정을 본 사람이나 아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는 바람에 의해 충격받아서 그렇다고 치고, 미동도 하지 않는 밤송이에서 떨어짐은 그 밤송이와 밤알이 약속한 바로 그때다. 자연만이 온전히 알 수 있는, 그 순간을 포착한 사람은 행운이고 유복하다고 할만하다. 해서, 엄숙한 섭리에 반하여 강제로 떨어뜨림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날이 환하게 밝았다. 곧 떨어질 것 같은 아람이 파란 하늘 바탕에 흔들거린다. 바닥에서 반질거리는 알밤은 방금 떨어진 것이고 조금이라도 습하면 오래전에 떨어진 것이다.
땅 위에 떨어져 튀기는 소리는 들려도 밤알은 보이지 않는다.
올려보면 안 떨어지고 내리 보면 떨어진다. 조화롭고 신기하다. 아무리 원해도 내 머리에 맞아주지 않으니 내 손으로 주운 밤톨로 내 머리 위에 떨어뜨려 볼까나?
울안에 있는 밤나무라도 울 밖에 떨어진 밤톨은 주운 사람 것이라는 우리의 아름다운 풍습이 가을 감나무 꼭대기에 남겨진 까치밥과 겹친다.
어린 시절. 어느 풍요로운 가을의 새벽을 되새겨본다./외통-
-성격이 명랑한 사람이 오래 산다.-밝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