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단지

외통궤적 2008. 5. 1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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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001016 꿀단지

새집의 넓은 부엌에는 살강이 부뚜막 위에 층층이 매여 있다. 각 살강마다 닮은 그릇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어 큰일 치른 집 부엌 같아서 누나의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우리 집 자랑거리의 하나다. 훗날 크게 쓸 요량으로 장만하는 것이다.

 

흰 백자 항아리가 나란히 놓여 있는 아래층 선반의 것은 식혜며 물김치며 여러 가지 밑반찬들이 들어있는 것 같은데, 백자항아리 한 개만이 달랑 제일 높은 선반 위에 놓여있는 것에 내 눈이 간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래층 선반의 단지들은 뚜껑이 얇은 접시그릇으로 덮여 있는 것과 다르게 윗선반의 홀로 단지는 두꺼운 질그릇을 엎어서 덮어놓은 것이 수상 적다. 이것이 내 눈에 들었고, 이후 이 단지에 눈독을 드린다.

 

기회가 왔다. 어른들은 이미 점심을 드시고 들에 나가셨다. 모름지기 동생들을 업고, 걸리고 가셨을 것이다. 그래서 집은 텅 비었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나는 홀로 무슨 짓을 하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무대가 이제 펼쳐졌다.

 

차려 놓은 밥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치웠다. 유심히 그 단지를 바라보며 접근하는 방법을 생각 하지만, 넘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서 온갖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깨질 물건들이 즐비하게 늘여있는 부뚜막 위에 발을 디디든지, 손으로 선반을 잡고 매달리든지, 어느 쪽이든지 불가능하도록 돼있는, 내 키를 잘도 재셔서 적절히 배치하여놓으셨다. 성채와 같이 만들어 놓은 어머니의 재주를 내가 능가해야 되는 결전의 날이 된 셈이다.

 

방법은 부뚜막 위에 발 디딤을 만들어서 내 키를 키워놓고 볼일이다. 베개를 있는 대로 내 와서 우물정자로 걸쳐놓고는 그 위에 단단한 나무 도마를 올려놓았다.

 

그렇게 놓고 보니 이제 그 발판 위에 올라가야 하는 또 다른 일거리가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밖에 나가서 짚단을 끌어 드려서 쌓고 다시 그 위에 도마를 올려놓았다.

 

오른손으로는 낮은 살강을 잡고 왼발은 도마를 딛고는 온 힘을 다해 팔을 당겼다. 성공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뚜껑을 열고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 봐야 할 텐데 오른손은 선반을 잡고 왼손은 뚜껑을 들었으니 빈손이 없다.

 

이 일을 또 어쩐다? 뚜껑을 어디에든 놓아야 할 텐데 도무지 놓을 자리가 없다. 다시 내려갔다가 또 다시 올라올 마음은 내키지 않는다. 꼭 실패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자리에서 질그릇 뚜껑을 집단 위에 던졌다. 요행으로 깨지지는 않았다. 정말 요행으로.

 

그러나 아궁이 돌에 부닥쳐 이가 한쪽 빠지고 말았다. 뚜껑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 왼손으로 선반을 옮겨 잡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단지 속을 저어봤다.

 

단단하게 만져지고 마치 땅 위의 모래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혀끝에 대본다. 향긋한 냄새가 점막을 스쳐서 폐부로 스민다. 손가락을 힘껏 곶아 넣고 휘저어서는 그 손가락을 한 입에 빨아 삼키고는 서서히 내려온다.

 

그러나 다시 뚜껑을 덮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기진했다. 이 빠진 쪽을 뒤로하여 덮고는 그대로 베개와 집단을 제자리에 갖다 두고 비질을 곱게 해서 부엌을 말끔하게 치웠다.

 

이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나만의 보물을 발굴하였다. 다시 기회를 엿보지만 두 번 다시 짜릿한 단맛을 보질 못했다.

 

이 꿀단지의 꿀이 서리고 엉켜서 모래같이 되어있으니  내 손가락 자국이 아물지 않았다면 반드시 어머니에게 들켰을 것이다. 그게 걱정돼서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끝내 고백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꿀로 자주 아버지의 조약 환(丸)지었을 테니까 아마도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지금 늦게나마 아뢰오니 '그 날의 꿀단지 손자국을 지워주십시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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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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