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런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릴 때 내 몸놀림은 특이하여서 옳은 성장 과정을 밟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구든지 내 발톱을 보면 짐작할 것이다. 한쪽 발, 한 발톱만 두껍고 바위같이 튼튼한데 피부 빛은 아니다. 검게 물들어 평생을 내 발가락에 붙어 자란다.
아직은 취학 전, 한여름에 들로 산으로 헤맬 때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내디딜 발 앞의 땅바닥은 보는 둥 마는 둥, 내치다가 꼭 걸려서 깽깽이걸음을 하게 만드는 돌부리 하나가 우리 집 굴뚝 옆 골목길 바닥에 나와 있다. 그 돌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대로 늘 그렇게, 거기에 돋아 있다.
신발은 물놀이 때 신경 쓰이고, 발 빠지는 곳을 다닐 때 손에 들고 다녀야 하는, 짐밖에 되질 않으니 아예 집에다가 모셔놓고, 맨발로 나다닌다.
촉감 좋은, 땅 위의 모래 한 알 흙 한 줌이 발바닥을 통해 머릿속까지 스며들어 상쾌하기까지 하다. 진흙을 밟으면 발가락사이로 오물오물 올라오는 흙 장단에 춤추며 이 흙이 오관을 자극하여 기운이 뻗쳐 향기를 마시는 쾌감마저 있는데, 거추장스럽게 신은 왜 신어?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 튀어나온 돌부리에 꼭 그 발가락이 챈다. 그때마다 발가락이 으스러져 피가 맺힌다. 흙으로 땜질해서 피를 멎게 하고는 잊은 듯이 내 닫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같은 돌부리에 또 같은 발가락을 찧고는 역시 그 누구에게도 원망함이 없이 그 돌부리를 한참 노려보다가 씻은 듯이 내 갈 길을 간다.
여름만 되면 이 짓이 수십 번씩 거듭되건만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스스로 ‘다시는 이곳을 안 다닐 거다.’고 다짐만 할 따름이다. 왜 그 돌을 캐려고 하지는 않고 나만 그 돌을 밟지 말자고 다짐하는지, 왜 집에는 모르게 숨기는지, 하기야 야단만 맞을 테니까 못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때는 눈에 드는 모두가 그 생긴 대로 내게는 절대적 가치이고, 전부가 내가 넘볼 수 없는 숭고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내 몸만은 내게 붙었으니 내가 조절하여 내가 가꾸는 대상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곧 망각해 버리는 됨됨이의 탓은 아닌지? 몰아의 경지로 들어가서 내 신경조직의 다른 부분, 발을 다치지 않으려는 예비적 보호기능 등이 적어도 그 몰두하는 순간만은 잠재워져 그렇게 평형 걸음을 잃고, 발을 나직이 끌어 걸어서, 종내(終乃) 돌부리를 차고, 발가락이 터지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아닐지?
제대로라면 무슨 일에 전념하더라도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그 행동이 정상일 것 같다. 그래야만 대형의 사고가 방지될 듯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나는 미완성이었던 것 같다.
내 일생에 돌부리 하나를 평생 기억해 내는 모진 모습을 이다음에 그 돌부리에 보이고, 내 그때의 정경을 물어보면 속이 후련하겠다./외통-
-성격은 행위보다는 참된 감정으로 더 잘 시험 된다.-액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