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총처럼 생긴 풀 무더기 위를 딛는 내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물뱀이 잔잔한 물 갈기를 일루고 풀숲으로 꼬리를 감추었건만 발길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밤나무 숲에선 밤꽃 향기와 벌 무리 나는 소리만 귓가에 맴도는데, 머릿속 생각은 도무지 풀리지 않고 한데 엉켜있다. 도리질 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꼴망태를 땅바닥에 메어치지만, 땅인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생각은 반듯한 외갈래 길로 또렷이 정리되지를 않으니,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 봐도, 눈을 뜨고 땅을 내려 봐도, 속 시원히 트이지 않는다. 이럴 때 하느님은 왜 나타나지 않을까?
아버지가 ‘징용’을 가시게 되었다. 어젯밤 내가 잠을 청할 때에 두 분이 도란도란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잔잔한 한숨과 함께 말이 끊긴다. 집안 걱정이다. 일순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 없는 동무들 생각으로 돌변했다. 각각 그들의 생활상을 떠올리지만 어떻게 무슨 재주로 꾸려나가는 것인지, 도통 정리가 되지 않을뿐더러, 용케도 살아가는 그들의 의젓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필구', '부면장아들', '마쓰가와헤이구', 하나같이 명랑하고 꿋꿋한 친구들이다. 어떻게 하길래 집안일과 학교 공부를 같이할 수 있을까?
새날이 밝았다. 그러나 물어볼 기회는 당장에 없다. 마냥 뿌옇다. 연기 속을 헤쳐갈 수조차 없는 내가 답답할 따름이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 갈 수도 없는 일, 산신령께 오시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아 더 절망이다.
쉬 이익 하늘에서 날아와 ‘너는 내일부터 집안일만 돕고 학교에는 가지 마라’ 하신다면 결단코 안 가리라. 어린 동생과 어머님 할머님 모시고 꿋꿋이 살리라. 몸만은 튼튼하게 해 주십시오. 간절한 소망의 한숨이 코밑의 청포 포기의 진남색 꽃을 감동으로 끄떡이게 할 뿐인 것을.
표현할 수 없는 고민을 안은 채 며칠이 또 지났다.
이거 웬일인가?
집안 어른들의 ‘장손 대우’와 ‘시제 모시는 걱정’, ‘좋지 않은 아버지의 건강’, 징용은 일인들의 최후 전쟁 수행에 보탬이 되지 못할 것, 이런 모든 걸 알아차렸을 신들의 결정인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만은 면하신다는 소식이다.
이번엔 안 가도 되신다!
뭉게구름 사이로 제비가 솟아오르고 종다리 소리가 한결 부드럽게 들린다. 하늘은 은빛으로 반짝인다. 내 까만 눈동자도 반짝이며 응답했다./외통-
-근사하게 보이는 인생을 더는 믿지 말며, 지나간 세월을 보충하라.
그리고 마치 그대의 최후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라.-W.들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