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롯가

외통궤적 2008. 5. 9. 12:01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1349.000925 화롯가

노변정담(爐邊情談). 얼마나 정겨운 말인가. 고작 두 셋, 많아야 넷이 될 텐데, 고즈넉이 얼굴 마주보며 볼이 달아오른 모녀간, 김장 이야기를 하거나 인두를 화로에 얹어놓고 저고리 동정을 다는 법을 배우는 딸과 그 어머니, 이제 막 밖에서 들어온 아버지를 맞은 아들이 손바닥을 화로 턱에 얹고 올 겨울나기 무구덩이에서 무를 내는 일을 의논하는, 모두가 소박한 시골 농가의 전형이다.

 

행세깨나 하는 집의 안방 화로 가에서는 오늘은 뉘 집 어른이 사랑에 들었는데 무슨 술로 대접을 해야 되는지를 의논하려는 고부간 대화 일 것이고, 사랑채 화로 가엔 이웃 아무개 진사 양반과 뉘 집 아들이 과시에 어떻게 됐는지를 묻고 사뢰는, 세상사의 일일 것은 똑 같다.

 

화롯가에서 의논함은 화로라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탁자구실이 있고, 불이라는 어마어마한 폭발성을 지녀서 흉물로 돌변할 수 있는, 화기를 사이에 두고 하는 이야기니 부드럽지 않고는 안 될 상황을 교묘하게 합성하는 기막힌, 예술의 경지에조차 이른 우리들만의 전통이자 창조된 문화의 일부인 것 같다.

 

아쉽게도 현대 문명에 밀려서 이제 그 화로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지만 우리네 조상들은 대대로 이 화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았으며 집안의 안위(安危)를 담고 그 집의 수호화(火)신의 구실을 했을 것이다.

 

불에 무슨 씨가 있으랴만 조상들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화로의 불을 그 집 불의 종자그릇으로 여기고 숭상하였다.


불을 남의 집에서 얻으려 한다면 그 집은 장래 희망이 없는 집으로까지 생각하고 업신여겼으니까!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그 집사람들의 관리능력의 상실쯤으로 치부하는 턱이다.

 

'고콜'이 차츰 없어진 뒤 이동식 화로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지는 화로의 종류도 다양하다. 무쇠화로, 놋화로, 질화로가 있다. 진종일 화로를 보고 살아야하니 그 모양새 또한 다양해서 집집의 것이 다르다.

 

우리 집이 종가인 관계인지는 몰라도 보기에도 예스러운 무쇠화로가 하나 있는데, 나는 같은 유형의 화로를 아직 보지 못했다.

 

이즈음 골동품 점에서도 눈에 뜨이질 않으니 비록 어릴 적에 본 우리 집 물건이긴 해도 새삼 정이 간다.

 

이 다음에 집에 간다면 아무리 큰불이 났다 하드래도 타지 안했을 그 무쇠화로를 다시 보고, 그 화로와 내 깊은 인연을 회고하고 싶다.

 

굽은 내 양발바닥을 마주대면 알맞게 붙도록 경사지며 동글고, 화로 굽의 높이 또한 내 발바닥을 붙여서 조금 헐겁게 움직일만하다. 게다가 옆으로 볼록 선을 층층이 둘러 도드라지게 해서 발의 촉감을 높여준다.

화로를 차고앉으면 발이 따뜻하고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녹는, 시쳇말로 인체 공학적으로 만든 걸작이다. 또 화로의 몸통은 나팔 모양으로 벌어져서 위로 넓어지긴 했어도 되바라지지 않고 밋밋하게 펼쳐져서 편안한, 안정감을 지켜 마무리해 맺었다. 높이 또한 내가 앉아서 손바닥을 화로 위에 올려놓으면 딱 맞는 높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 철 집에 있을 때에 많은 시간을 화로통을 끼고 지냈다. 어쩌면 겨울철 방안 생활에서는 내 일부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화로엔 반드시 그 화로 불을 다루는 부삽이나 부젓가락이 아니면 인두가 꽃이게 마련인데, 대개 부삽은 사랑채의 화로에, 건너방 화로에는 부젓가락, 안방은 인두가 꽃이게 마련이다.

 

주로 안방에서 누나와의 화로 불 싸움이 잦았던 것은 내가 화로 불에다 감자나 고구마를 묻거나 콩을 볶는 것 때문이다.

 

그때마다 내가 이겨서 만족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긴 것은 분명한데 내가 판판이 진 것 같아서 속이 상하고 후회막급이다.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몽땅 양보하고 인두를 써서 시집 갈 때 갖고 갈 모든 혼수의 손수 제작을 적극 돕고 싶다.


아니다. 내가 만들어 줄 테다. 그러나 다 그른 일이니 어쩌랴./외통-

 

인생의 가치는 생애의 길이에 있지 않고

그 생애를 만드는 활용에 있다.-M.E.D.몬테뉴-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름1  (0) 2008.05.10
새끼꼬기  (0) 2008.05.09
봉숭아  (0) 2008.05.08
빙거  (0) 2008.05.08
동생  (0) 2008.05.08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