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하면 우리나라 정서를 듬뿍 담은 꽃으로, 나이 든 이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나이를 먹으리만큼 먹었어도 매양, 같다.
노랫말에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 나타나듯이 봉숭아는 여리고 보드라워서 바람이 불거나 발길이 잦은 곳에서는 견뎌나질 못하고 녹아내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느 집이나 여자들만 다니는 뒤란이거나 별도로 만든 꽃밭에 심게 된다.
우리 집은 머슴애와 함께 가꿀 수 있게 마당 한구석에다 작은 꽃밭을 만들고 거기다가 어지간히 자랐을 때의 키순서대로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접중화(접시꽃), 땅 감(도마도)도 한몫 끼워 심어 가꾼다. 맨 뒤엔 줄을 매고 나팔꽃도 심었다.
초등학교 갓 들어가서다. 초여름의 어느 날부터 내게 조심해야 할 어떤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누나와 엄마의 밀담을 엿들은 후부터다.
저녁잠을 자면서도 어지간히 설치기 일 수인데도 이 일만은 꼭 막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아무리 뜻이 있는 누나라고 해도 사나이 대장부의 결심을 흔들지 못한다.
누나는 굽히지 않는 동생의 손톱에, 밤에라도 몰래 봉숭아 물 드리려 하니 난들 잠이 올 수 있겠는가?
들락거리며 누나의 잠든 기색을 눈치채고 편안하게 자고 일어나 보니 왼손 약지와 새끼손에 피마자 잎이 칭칭 동여매어져 있겠지! 앗, 불사. 크게 당황한 내가 길길이 뛰는데도 엄마와 누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찌감치 사라지셨다.
누나는 학교로 줄행랑을 쳤다. 엄마는 잔잔한 웃음만 머금은 채 부엌일에만 열심이다.
오늘 저녁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판을 어머니께 예고하고는 이내 바느질 그릇을 찾아서 헝겊으로 손가락을 싸매고. 학교로 달려갔지만, 범인 누나는 어디에 숨었는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날 내 학교 공부는 손가락을 감추는 공부, 나 홀로 특별학습을 진종일 했을 뿐이다.
이튿날까지 누나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점점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우리 반 남자애들은 아무도 손톱에 봉숭아 물 드리지 않았고 나만이 별난 애로서 놀림 받으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누나와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친해졌고 예쁜 누나의 손톱과 내 손톱에 들인 분홍색이 지워지도록, 누구의 물이 오래가고 더 예쁜가를 매일 비교했다.
이 놀이는 새로운 흥미조차 더 해졌다. 오늘까지 내가 사는 동안 모든 일에 타협하고 현실과의 적응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 싹 텄다. 이때부터 ‘순화의 물’이 들여졌다.
내 손톱에 물들이는 날, 누나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사랑 징표를 새겨주었다. 누나는 그 밤에 향기에 가득한 꽃길을 나와 함께 한없이 걸었을 것이다.
모두가 무지개 같은, 꿈결 같은 옛일이다./외통-
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헛되이 살지 않게 하라-에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