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외통궤적 2008. 5. 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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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000925 봉숭아

봉숭아 하면 우리나라 정서를 듬뿍 담은 꽃으로, 나이 든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고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나이를 먹으리만큼 먹었어도 매양 같다.

 

노랫말에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 나타나듯이 봉숭아는 여리고 보드라워서 바람이 불거나 발길이 잦은 곳에서는 견뎌나질 못하고 녹아내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뉘 집이나 여자들만 다니는 뒤란이거나 별도로 만든 꽃밭에 심게 된다.

 

우리 집은 머슴애와 함께 가꿀 수 있게 마당 한 구석에다 작은 꽃밭을 만들고 거기다가 어지간히 자랐을 때의 키순서대로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접중아 꽃, 땅 감(도마도)도 한 목 끼워 심어 가꾼다. 맨 뒤엔 줄을 매고 나팔꽃도 심었다.

 

초등학교 갓 들어가서다. 초여름의 어느 날부터 내게 조심해야 할 어떤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누나와 엄마의 밀담을 엿들은 후부터다.

 

저녁잠을 자면서도 어지간히 설치기 일 수인데도 이 일만은 꼭 막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아무리 뜻이 있는 누나라고 해도 사나이 대장부의 결심을 흔들지 못한다.

 

누나는 굽히지 않는 동생의 손톱에 밤에라도 강제로 봉숭아물을 드리려고 하니 낸들 잠이 올 수 있겠는가?

 

들락거리며 누나의 잠든 기색을 눈치 채고 편안하게 자고 일어나 보니 왼 손 약지와 새끼손톱에 피마자 잎이 칭칭 동여매어져 있겠지! 앗 불사. 크게 당황한 내가 길길이 뛰는데도 엄마와 누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찌감치 사라지셨다.

 

누나는 학교로 줄행랑을 쳤다. 엄마는 잔잔한 웃음만 머금은 채 부엌일에 열심이시다.

 

오늘 저녁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판을 어머니께 예고하고는 이내 바느질그릇을 찾아서 헝겊으로 손가락을 싸매고... 학교로 달려갔지만 범인인 누나는 어디에 숨었는지 눈에 띠질 안았다. 그 날 내 학교 공부는 손가락을 감추는 공부, 나 홀로 특별학습을 진종일 했을 뿐이다.

 

이튿날까지 누나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점점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우리 반 남자애들은 아무도 손톱에 봉숭아물을 드리지 않았고 나만이 특별난 애로서 놀림 받으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누나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친해졌고 예쁜 누나의 손톱과 내 손톱에 물이 지워 지도록, 누구의 물이 오래가고 더 예쁜가를 매일 비교했다.

 

이 놀이는 새로운 흥미조차 더 해졌다.

 

오늘까지 내가 사는 동안 모든 일에 타협하고 현실과의 적응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부터 싹 텄다. 이때부터 순화의 물이 들여졌다.

 

내 손톱에 물들이는 날, 누나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사랑의 징표를 새겨주었다. 누나는 그 밤에 향기에 가득한 꽃길을 나와 함께 한없이 걸었을 것이다.

 

모두가 무지개 같은, 꿈결 같은 옛 일이다./외통-

 

 

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살지 않게 하라-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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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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