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거

외통궤적 2008. 5. 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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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6.000924 빙거

빙거(氷車). '얼음 위에서 타는 차?'라는 나름의 풀이지, 소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 사투리일 수도 있겠다. 이 빙거는 내 어릴 적 고향의 겨울을 그대로 그리는 외마디 서정시다.

넓은 논배미의 논두렁을 까고 물을 대어 얼음을 얼려서 빙판을 만들었다. 그 위에서 새까맣게 무리 지어서 빙거를 타는데, 더러는 두 발만 붙여서 쪼그리고 앉아 타고 대개 꼬마들은 널판을 넓게 붙여서 양반다리를 하여 편안하게 앉아 지친다. 빙판 위에 있는 애들 가운데 외지에서 온 애들이거나 있는 집 애들은 스케이트를 신고 타기도 하지만 자리가 좁아서 그저 남들 기만 죽이는 일로 그치게 된다. 워낙 좁으니, 운신이나 제대로 돼야 말이지.

얼음판 언저리 한 귀퉁이에는 으레 모닥불이 피워지는 이곳은 넘어진 애들이나 얇디얇은 얼음 숨구멍을 모르고 지나치다가 빠진 애들의 응급피난처가 되는 셈이다.

웃음이 절로 나는 갖가지 사고가 있게 되는데, 아예 옷을 벗고 말리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벗은 채로 빙거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애들도 부지기수다. 그런가 하면 작고 큰 상해사고도 일어나는데, 그 흉물은 빙거 탈 때 양손에 쥐고 얼음을 찍어서 뒤로 밀어내는 뾰족한 쇠붙이가 달린 집게가 그것이다. 그중에도 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맞은편에서 오는 빙거와 정면충돌하는 일이 잦고 크게 다친다. 손에 쥐었든 꼬챙이를 그대로 들고 돌진해 오는 빙거를 막고자 하여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빙거를 타다가 눈을 찔려서 눈먼 애도 있다면서 먼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는 아마도 아버지께 손자의 빙거 타기 금령을 내리셨는지, 도무지 빙거 이야기는 내 입 밖에도 낼 수 없도록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종손을 지켜야 하는 수행원이 형벌이나 되어야 함께 나가서 놀도록 할 텐데 손위에는 누나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얼음을 지치는 수단이기도 한 빙거와 그 부품들 모두는 내가 자체 해결해야 한다. 나는 이 엄청나고도 어려운 일을 어느 날 겁도 없이 실행에 옮겼다.

집에 있는 연장이라고는 손자귀와 낫, 도끼, 뿐이다. 톱이 하나 있긴 한데 이게 장작 자르는 큰톱이니 내가 의도하는 빙거 만들기에는 벼룩 잡는데 망치질이다. 그래도 덤벼든다.

아버지께도 어머니께도, 할머니는 더더욱 말할 수 없으니, 모두를 비밀리에 차근차근 진행됐다. 대장간에다 맞추면 잠시면 될 텐데 이것도 내 힘으로는 돈 때문에 안 되고, 해서 내 손으로 만들기로 했다.

우선은 ‘빙거’의 ‘굽’에 달을 철사를 구하는 일인데 이게 우리 집에는 붙어 있는 곳이 없으니, 전신주의 전선을 끊어올 수도 없고 돈으로 사 올 수도 없다. 해서 궁리 끝에 제방에 나가서 제방 둑을 타고 바닷가 쪽으로 내려간다. 겨울이라서 보는 이는 없었다.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간 바닷가 쪽의 끄트머리의 돌망태가 눈에 들어왔을 때, 마치 살인이라도 하려는 듯 사방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주먹 만 한 돌을 들었다. 그리고 한 곳을 집중적으로 반복 두들겨 댔다.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이 많은 부분의 철사가 이미 없어진 것을 보면 이곳은 소용에 닿지 않을 곳에 처진 돌망태인 것이 틀림없다고 자위하면서도 이번에는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동무를 끌고 나왔을 텐데, 그렇지만 내 자존심 상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 또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한 발쯤을 잘라서 감추었다가 그날 저녁을 먹고 난 다음 어둠을 기다려서 가져왔다. 그 철사는 나뭇가리 속에 숨기고서 다음 단계인 ‘빙거’ ‘굽’을 만드는 일을 궁리하던 끝에 팔뚝만 한 통나무에 붙이기로 하고 솔가지 단을 풀어서 찾지만 적당한 굵기의 나무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다.

장작더미를 풀어서 쓸 만한 것을 골랐다. 손자귀와 그 장작 토막을 들고 앞집 나뭇가리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서 일을 벌인다.

손자귀로 깎고 다듬어서 모양새는 됐건만 그 길이가 장작 길이이니 반절은 잘라야 하는데, 이 자르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다. 철사를 알맞게 자르는 일, 굽에다 붙이는 일, 젓는 손잡이의 끝에다 철사를 꽂고 그 끝을 갈아야 하는 일, 모두가 손자귀와 돌로 해야 하니 지금 내놓는다면 일품(逸品)의 수제품이다.

모양이나 볼품은 없어도 기능은 충분하고 투박하고 대형이니 두고두고 내 엉덩이가 놓여도 견딜만하다.

몇 날이 지났는지, 얼음은 녹고, 새로운 내 관심거리에 밀려서 그 빙거를 감추어 둔 곳조차 잊고 말았다.

이후 그 빙거는 얼음 위를 한 번도 미끄러지지 못했고 내 혼을 담고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때부터 삶을 향한 나의 의지와 집념의 싹이 트고 자랐나 보다.



가장 안전한 굴렁쇠에 관심 있게 된 나는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졸랐고 적당한 굴렁쇠를 구하지 못한 아버지는 대장간에서 쇠뭉치로 굴렁쇠를 만들어 주셨다. 그 굴렁쇠는 언제나, 몇 년이 가도, 굴뚝 옆에 놓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질 못했다. 혼자 노는 놀이래서 그랬나 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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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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