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외통궤적 2008. 5. 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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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951205 징용

하늘은 맑다. 수평선의 흰 돛배에 깃털 구름이 매달려 간다.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화륜선이 뒤에 우뚝하다. 하늬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오후의 바닷물이 짙푸른데, 밀려간 파도 자국 위에 조개껍데기 조각이 반짝 빛났다. 다시 밀려오는 파도에 이번에는 흔적조차 사라진다.

모든 게 있을 것 같으면서 없어지듯, 내 머릿속에도 반짝이는 조개 편린(片鱗)이 반짝이다 사라진다. 그것도 산더미처럼 밀려와 머릿속을 휘졌고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다.

새까만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아도 짙푸르고 팔을 뻗어 붙잡아도 허공이다. 솔밭 넘어 ‘동자원’ 마을 위에 솔개만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 오른손 주먹에 힘을 주지만 곧 힘없이 풀리며 다시 고개 숙여 발밑을 바라본다. 하얀 알을 입에 물고 줄줄이 이어가는 개미 떼를 유심히 바라본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 제정신에 돌아왔다.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여럿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나보다 대여섯 살 위 애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집안을 꾸려 나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많은 농사일을 어떻게 하는지, 두 마리씩이나 되는 소를 그들은 어떻게 먹여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들처럼 나도 내 힘으로 우리 소를 키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공부는 할 수 없게 되고, 영영 꼴머슴, 농사꾼으로 돼야 하나! 만약, 만약에 말이다. 꼭 만약 이여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진지하게, 가장 골똘하게,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깊은 고민을 하면서 상념에 사로잡혔다. 온몸의 힘이 싹 빠지면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햇무리 진 뜨거운 오후의 들녘을 가로질러 내려온 검은 기차가 저 멀리 ‘철다리’를 막 지나 ‘염성’ 정거장을 향해 천천히 솔밭 속으로 사라진다. ‘오릿말’ 고모님이라도 저 기차로 달려오시면 모든 일이 풀려 내 머릿속이 상큼하게 맑아질 것 같다. 저 푸른 파도에 씻겨서. 어젯밤 선 잠결에 들은 ‘어머이’ ‘아버이’의 도란도란 걱정 말씀으로, 내 조그만 머리통이 터질 것 같다.

아버지의 징용 소식은 아무리 진저리 쳐도 상큼하게 지워지질 않는 상념, 고모님이 오셨으면!

낫자루 냅다 던지고 바닷가로 내닫는데 한낮의 ‘동자원’ 밭머리에 하얀 할머니 머리가 밭이랑 사이로 얼른거린다. 어리디어린 손주가 무얼 생각하는지 짐작이나 하실까?/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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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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