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농촌만이 그나마 안정되어 있었고 꾸밈새 있는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 무렵 도시의 많은 사람이 먹을거리를 찾아서 농촌으로 파고들었는데, ‘장전’ 아주머니는 우리 집을 '주인집'으로 정하고 달을 거르지 않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만병 치료 약 ‘다이아찡’ 한 알에 쌀 한 되, 내 주먹만 한 미제 전구는 속이 안 보이게 덧칠했다고 해서 그런지 한 개에 무려 쌀 한 말을 달란다. 그래도 시골에선 이 기막히게 영험(靈驗)한 약을 없어서 못 샀고,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
또 보지도 못한 ‘장수전구(長壽電球)’는 신기한 자랑거리의 하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부르는 게 그 값인데도 모두 몸살 나게 사고 싶다.
생필품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술로 만들다 보니 말이 아니다. 의약품은 생산조차 못 했고 공산품도 아주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전구만 해도, 하루에 한 개씩을 꽂아야 하는 시절이었으니 돈은 고사하고 속인들 오죽이나 상했으랴. 얼마를 달랜들 상관치 않고 사서 꽂고 싶은 심경이었을 것 같다. 우리 집도 몇 개씩이나 샀다.
돈 주고 내 물건이란 것을 사 본 일이 없는 내 앞에, 그 아주머니는 만년필, 공책 아닌 노트, 그림물감, 지우개, 수없이 많은 학용품을 쏟아냈다.
장전 아주머니의 속셈은 빗나갔다. 미동도 하지 않는 나를 훔쳐보다가 싱겁게도 그냥 주섬주섬 싸고는 다른 집으로 갔고, 나 또한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화롯가에서 책 읽기의 하루가 이어졌다. 어머니께 조르지도 않고 스스로 애써서 잊으려고 하지도 안 했으니 그저 내 평범한 생활의 일면인, 그것이다.
그런데 이상 한 일이 며칠 후 벌어졌다. 장전 아주머니는 내가 입을 만한 갖가지 입성을 한 보따리 풀어놓고는 또 내 눈을 살핀다. 그런데 이날까지 물건을 산다는 것, 그런 것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나는 손도 대보지 않고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이다.
무슨 이런 애 가 있을까? 바보인가? 등신인가? 엄마의 위압인가? ‘장전’ 아주머니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린이의 인내력에 마침내 불을 붙이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의젓한 아들을 두셨습니까? 수없이 다녀도 이런 애는 처음 봤습니다!’
이 한마디에 내 억제력의 보는 터졌다. 물은 터져 나왔다. 어깨가 들썩이고 눈물이 화로 가의 재를 품어 올렸다.
햇살을 못 이겨서 처마 끝을 떠난 고드름이 이따금 요란하게 태질하고, 배나무의 까치가 함께 어우러지며 여닫이 격자 창호지 문에 까치그림자가 선명하다.
가난이 물려준 극기의 정신이 그 정점에서, 마침내 임계의 벽을 뚫고 분출하는 승리의 눈물이었다. /외통-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하느님의 뜻을 바로 받드는 값있는 실존이다.-밝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