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이누나

외통궤적 2008. 5. 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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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000902 정남이 누나

밤과 낮의 명암이 인체의 리듬을 조정하고, 해와 달은 때와 철을 만들면 그저 여기에 맞추어서 살아온 조상들의 삶이 새삼 돋보이고 슬기롭게 보인다.

초와 분을 쪼개서 살아야 하는 요즈음 우리가 옛 조상보다 곱절이나 행복하게, 또 몇 곱이나 오래 사는 것도 아닌데도 그저 떠밀려서 너도나도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서두르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곱씹어 보고 싶다.

시간에 매인다는 것은 인생을 더 효율적으로 가동해서 사고의 폭과 물질적 풍요를 증대 함으로써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높여 나가는 데 있을 것인즉, 과연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고개는 가로저어진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그 첫째가 시간이고 둘째 또한 시간인데, 그 시간은 한편으로 보면 영원한 정지 즉 찰나(刹那)의 연속임을 알게 된다.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데 사람이 시간에 쫓겨 산다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서 보자. 우주가 그냥 거기 있고 태양이 그냥 거기 있다. 지구의 공전이 시간의 표준이 됨은 아닐 것이며 지구가 자전한대서 시간이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외계인도 자기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을진대, 당연히 우리의 이 시간은 지구적인 것에 국한된다.

시간의 개념은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된 인식에서 정의한 것에 불과 한, 인간 편의 개념인 것이다. 인간 필요에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시간을 좀 더 자유로이, 필요한 만큼 주물러 가면서 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 시간을 그렇게 중히 여기지 않아도 될 것인데도 말이다.

영겁이란 말이 있거니와 시작과 끝이 없는 천체는 그 전체가 하나이고 지금이고, 시작이고, 끝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 순간이 전부이고, 그 영겁이 하나인 우주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간에 인간 스스로 얽매여서 불행해야만 하나?

생각해 보자. 인식의 측면, 즉 지능지수가 낮을수록 행복 지수는 높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극단의 예인지는 몰라도, 인간 외의 생명체는 행 불행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죽는 날까지 행복, 또, 행복으로 가득히 차 이어지는 것 같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시사하는 명제인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

태양계를 떠나서 살자. 은하계를 떠나서 살자. 그러면 어떻게 가느냐, 인데 이것 또한 아주 쉽다. 시간은 인간의 관념이므로 이 관념을 은하계 밖으로 이식하면 된다. 비록 물리적 제약을 받는 몸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관념, 즉 사고만은 끄집어내서 천체의 다른 별에 있게 하자. 그 별의 시간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 별은 영겁(永劫)의 세월을 한 주기로, 영원과 찰라,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가 무한하게 존귀한 내 영혼에 상처를 입혔다.

우리 집이 할아버지의 외도(?)로 물려받은 가산이 없어지고 난 뒤 아버지의 힘으로 자수성가하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내가 겪어야 하는 정신적 갈등은 당시로선 아무에게도 상담할 수 없는, 내 가슴 속 우주적 뇌성이었다.

내가 입학하기 전 가을, 고모님은 모처럼 ‘정남이 누나를 데리고 친정엘 오셨고 ’정남‘이 누나는 처음 외갓집에 나들이 나왔다. 아마도 고모님은 이때까지는 오막살이 집이라서 데려오지 못했고, 덩치만이라도 꽤 큰 새집을 지었으니, 외갓집에 데려올 만도 했을 것이다.

요 없이는 못 자겠다는 투정을 바라보는 나는 도무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거니와 ’정남‘이 누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야 할 이유도 못마땅했다. 왜 요를 깔고 자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내게는 아무리 튼튼한 새 옷을 입혀도 첫물에 구멍이 났다. 벗고 자는 일도 없으려니와 한 번 입으면 그 옷이 해져서 살이 보일 때까지 갈아입지 않는, 철통같은 수구 꼴 통(?)이었다.

옷을 한번 갈아입히려면 한바탕 난리를 쳐야 하고, 반드시 내 울음이 터져야만 이루어졌다. 난 스스로 변화를 싫어하는 기질이 있었다.

이런 내가 온종일 얼마나 뛰놀았는지, 잠결에 방 네 구석을 몇 번이고 돌아야 하고 몇 번이고 앉아서 자고 엎어져 자야만 날이 새는, 나로서는 요가 있어야 잔다는 ‘정남’이 누나의 떼가 당연한 의문이었다. 어떻게 죽은 듯이 한자리에서 잘 수 있을까? 오히려 이상하다.

한술 더 떠서, 아침에 일어나서는 벽에 시계 없는 탓도 한다. 그럴만했다. 벽을 올려보며 고개를 몇 번이나 헛돌려, 속고 또 속으니 그렇겠지.

역시 ‘정남’이 누나의 속성이다.

우리 집 식구 모두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창문의 밝기, 참새 소리, 까치 소리, 귀뚜라미 소리, 땅거미가 있으니, 시계가 무슨 소용이랴! 문명의 산물인 기차 소리와 중석 광산의 남포 소리가 그 사이사이를 가늠하게도 한다. 또한 나무 그늘이 봉 당에 드는 위치, 햇살이 떨어지고 지워지는 위치, 저녁에 드는 뜰 안의 담장 그림자,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다.

하지만 그때 시계가 없어서 입었던 어린 마음의 상처가 시계 무용론을 장황히 늘어뜨리며 우주론까지 끌어가게 한다. 요 없이 잔 내가 그때를 돌이킬 수 없어서, 억지를 부린다. 그때, 어린 내게는 그냥 없다는 것에 기죽었다. 또 마냥 부끄러웠다.

지금은 달리, ‘정남’이 누나에게 한 마디 못한 내가 새삼스럽게 더 부끄럽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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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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