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타기

외통궤적 2008. 5. 5. 13:45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1420.000903 나무 타기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장을 갖고 태어나는 것 같은데 나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예외일수는 없다.

 

나는 몸체에 비해 팔다리가 길어서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 이 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불편을 주고 있었으니, 우리나라 의류의 표준 치수와 동떨어져서 있는 내 몸 때문에 겪는 고충이다. 지금처럼 여러 가지의 치수의 다양한 옷이 나오지 못하고 한국 사람의 표준형에 일치시킨, 같은 비례의 크기뿐이니 말이다. 양복은 고사하고 속옷 만해도 그렇다. 목에다 맞추면 소매길이가 짧고 소매에다 맞추면 목둘레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이니 평생을 마누라 핀잔 속에 산다. 이것뿐이 아니다.

 

내 몸의 균형 잃은 팔 다리 때문에 어릴 때 여러 가지 별명을 얻는 빌미를 주었으며 그들 별명에 대해서 내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름 '버마재비', 사마귀같이 팔다리가 길게 달렸대서.

 

그런데, 내 신체의 생김생김이 남에게는 어떻게 비쳤건 내게는 그야말로 말 잘 듣는, 몸통에 붙어있는 연장이다. 팔과 다리가 길어서 어릴 때부터 높은데 있는 물건 내리는데 탁월하여 그 진가가 발효되어 형제간에 나를 빼고서는 되는 일이 없었고, 동무들끼리 '자치기'놀이를 해도 내 발이 우리 팀의 잣대에 이용되었으니 내가 들어가게 된 쪽은 안 해도 이긴거나 진배 없었다. 땅 따먹기를 해도 내 뼘으로 재면 곱의 면적이 됐으니 그까짓 사금파리 실탄의 명중률쯤 떨어져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땅은 내가 다 따먹기 일쑤다.

 

모든 관절의 회전각도는 타의 추종불허다. 엄지는 마치 불어진 것처럼 꺾이고, 다른 네 손가락은 손등 쪽으로 활처럼 휜다. 발은 발등이 정강이와의 각을 칠십도 까지 좁혀지고 가랑이 벌리기가 또한 유달리 자유롭다.

 

이런 조건은 저절로 악력(握力)을 키웠고 지레대의 원리까지도 작용해서 또래의 팔 씨름은 내게 당할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 먹은 형들에게도 적수가 되곤 했다.

 

몸이 그쪽으로 발달을 하려고 자극하는지, 어렸을 때는 어른들 속 썩히는 짓을 꽤나 했다.

 

집 앞의 한길 가에 서 있는 전신주를 올라가면 할머니는 두 팔을 앞으로 저으며 고함을 치신다. 학교 점심시간에 집에까지는 왔지만 점심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무부터 올라간다. 디딤쇠도 없고 손잡이도 없는 데다 가시가 덕지덕지 나있고 새까만 골탄 칠을 한 전신주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오른다.

 

남보다 팔을 폈을 때의 둘레가 커서 몸을 나무에 당겨 붙이기가 쉽다. 발바닥은 자유로이 나무둘레에 밀착되어 순식간에 오르게 된다. 오른 상태에서도 제자리에서 얼마든지 지탱 할 수 있는 요령도 생겨서 마치 젖먹이 이빨 날 때처럼 근지러워 물어뜯는 쾌감마저 느끼니 할머니가 혼비백산 할 지경인들 상관하랴! 종국에는 어머니가 나오심으로써 내 재주는 아무도 보는 이 없이 싱거운 끝을 맺고 만다.

 

또 이런 일도 있다. 뽕 나무가 우리 집 모퉁이 한구석에 한 그루 있었는데, 이 나무는 꽤 커서 가지가 여러 갈래로 벌어져 있다. 해마다 먹음직한 '뽕 오디'가 새까맣게 달리는, 내게는 봄철 한 때의 군것질감이 되는 살아있는 사탕나무다. '뽕 오디'를 털어서 주운 것은 흙이 묻었다며 외면하고, 굳이 나무에 올라 따먹기를 고집하는 나를 별 도리 없이 할머니가 승낙하신다.

 

지켜보는 가운데 몇 개를 따오기로 하는 승낙을 간신히 받고 비호같이 올라가서 입이 온통 푸르다 못해서 검게 될 때까지 따먹는다.

 

손자 책임 떠맡은 할머니는 목이 아파 어쩔 줄을 몰라 하시면서 내가 내려오기만을 재촉하시는데, 욕심이 화근이라던가. 더 높은가지를 올라서 가느다란 가지를 훑어가며 재주껏 기량을 내는데, 앗 불사. 그만 중심을 잃고 떨어지고 말았다. 긴 팔도 긴 다리도 아무런 소용없이 죽는 일, 체험일 수 없는 절박한 순간이다. 무엇인가를 잡자는 본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웬 일인가 궁둥이는 제일 밑의 나뭇가지에 걸쳐 있고 손은 지극히 자연스레 나뭇가지를 잡고 있지 않는가. 순간 할머니의 동정을 살피는 내 눈에 할머니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목이 아프셔서 고개를 숙이고 계시던 참이었다. 즉시 아무 일 도 없는 듯이 시치미를 뗀 후 식구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는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느니, 물 좋아하면 물에서, 나무 좋아하면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얘기를 수 없이 들었는데 또 듣기 싫으니까.

 

이런 신체조건을 살리지 못한 점이 조금은 후회되기도 하는데, 아마도 그대로, 그야말로 너 하고 싶은 대로하라고 했으면 모르긴 해도 맨손으로 벽을 오르는, 그런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는 되지 못했어도 그쪽의 애호가나 관심 있는 동호인은 됐을 성싶다.

 

나만이 있을성싶은 회상이다./외통-

 

-진정한 지식은 겸손하며 세심하다.

뻔뻔하고 주제넘은 것은 무식한 것이다.-J.글린빌-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용  (0) 2008.05.07
장전 아주머니  (0) 2008.05.06
누님 입학하는 날  (0) 2008.05.04
정남이누나  (0) 2008.05.04
발표  (0) 2008.05.03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