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나, 배나무, 복숭아나무는 옛사람의 생활에 애환을 실어다 주면서 길흉을 점치는 나무이기도 했다.
복숭아나무는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고 하며 요사이도 복숭아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으니 웬일인지 알 수 없다.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고 여기고 복숭아 잎을 갖고 있으면 지네나 물것이 달려들지 않는다는 속설로 보면 오히려 집안에 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처마 밑이 길다. 이엉이 두어 오래기가 빠져나와 있고 그 짚 오래기 군데군데 잠자리가 졸고 있을 즈음이다.
뒤란 한 귀퉁이에, 시커먼 겉 딱지를 두르고, 땅 이끼가 푸르게 깔린 울타리 밑 한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오래된 복숭아나무는 몇 개 안 되는 열매를 매달아 힘겹게 늘이고 서 있다.
이따금 울 밖 사람들의 입을 다시게 하거나 입안을 침으로 가득 채우는 마술 또한 갖고 있다. 남쪽으로만 뻗어있는 두어 가지 외에는 더 열었어도 거느릴 힘도 없어 보였고 지탱할 뼈대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군데군데가 움푹움푹 패여서 묽은 진을 내 뿜고, 잎은 드문드문 붙어있으니 그나마 복숭아 몇 개 붙여준 고마움도 알아줄 일이다.
크지 않고 잘 익은 복숭아는 천도(天桃)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다. 그래선지 하나같이 벌레가 들어있다. 벌레 있는 쪽을 도려내고 먹는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니, 벌레는 복숭아의 씨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나다.
입에서 물렁물렁, 이물감에 반사적으로 내뱉는 내게 ‘복숭아벌레는 약이 된단다.’라고 이르신다. 그 한마디 말씀에 그저 덤덤하다.
복숭아 따 먹을 즈음이면 앵두가 한물간 철이라서 철 따라 드나든 뒤란 발걸음이 그칠 줄 몰랐던 아득한 옛이야기의 하나다.
그래도 새집을 지을 즈음 앵두나무와 배나무는 옮겨 심었지만, 그 복숭아나무는 영영 볼 수 없었다. 하늘의 맛은 혀끝에서도 코끝에서도 맛보고 느낄 수가 없다.
복숭아나무도 늙지 않았더라면 앵두나무와 배나무처럼 가지를 몽땅 처 버리고 몸뚱이만이라도 옮겨 심어서 살렸을 것이 아닌가?
늙으면 자연도태(自然淘汰)의 질서에서조차 우선하는 진리를 이즈음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사무치는지 모르겠다. 왜 울타리 안의 다른 두 나무에 비해 사라진 복숭아나무만이 아련히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사라졌기 때문이리라./외통-
-운명을 슬퍼말고 실상을 뚫어보라-밝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