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

외통궤적 2008. 5. 2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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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00801 제삿날

  삿(갈대)자리 방바닥의 네 벽 밑과 네 귀퉁이를 번갈아 헤매며 자다가,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일어나 앉아서 자다가, 다시 엎드려서 자다가 어느새 누워서 잔다.   그러니 잠꼬대인들 오죽이나 했을까? 흔들어 깨우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몇 번이고 쓰러지는 아들의 잠을 깨워서 기어이 데려가시려는 곳은 작은집 큰아버지 댁이다.  

아버지가 종손인 우리 집에 대로 물려받은 큰 병풍이 이 제사에서 제구의 필수품이 되니, 아무리 밤늦게 집에 돌아오셔도 이것은 챙기신다.   선반 위에서 병풍을 내려 꿩 꼬리로 만든 '털개'로 훑어 말끔하게 하신 다음 방바닥의 한 귀퉁이에 세워 놓는 일은 낮에 하셨다.  

그 병풍을 어깨에 메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아끌다시피 하시며 잰걸음으로 가시는, 제삿날의 한밤중의 첫 행사다.   하늘을 둘러쓰니 달은 밤송이 사이로 흘러가고, 땅을 딛고서니 발아래 돌부리를 달빛이 가려낸다.  

뿌리내린 집터의 마당을 천년이나 지켜온 듯, 담벼락을 양발 위에 얹어서 끼고, 그렇게 아무도 빼 갈 수 없고 아무도 넘어뜨릴 수 없도록 버티고 서있는 밤나무다.  

사방은 고요하다. 고고(孤高)한 달빛만이 흰 두루마기를 더욱 희게 할 뿐이다.   텃밭을 끼고 마당을 질러 대문을 들어설 때 외양간의 '칡 암소'가 묵직이 낮은 음성을 내어 우리 부자의 당도를 알리고, 이윽고 큰아버지의 마중이 잇따른다.  

수인사가 말없이 이어지더니 병풍이 쳐진다. 제상이 마련되고, 촛대가 얹어지고, 향로가 놓이고, 소반과 지필묵(紙筆墨)이 그 위에 놓인다. 차례대로 봉당(封堂)에 나가 세수를 한 다음 방에 둘러앉는다.   읍(邑)에 계신 작은아버지는 오시지 못하셨고 막내 작은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는가 싶더니 큰아버지 머리의 미세한 움직임을 재빨리 알아채고 지방을 접기 시작한다.   큰아버지께서는 조용히 먹을 가시고 작은아버지는 붓끝을 대문 이로 지그시 깨물어 보드랍게 펴시는데, 용하게도 입술에 먹물이 묻지 않는다.   턱을 밭치고 쳐다보는 나를 건너다보시는 아버지의 입가엔 미소가 담긴다. 말 없는 가르침이 시다.  

접은 지방(紙榜)을 정성스레 소반 위에 놓고 나더니 숨을 깊이 들이시며 자세를 고치고, 먹을 찍어 지방(紙榜)지 위에 이주 가까이 닿을까 말까 대고는, 모필 끝과 최초로 찍힐 지방 위의 시작점에 혼을 쏟아붓는다.  

종이가 뚫릴 것만 같다.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이 이러했을까? 붓끝이 파르르 떨린다. 한순간이 지나고 글자가 새겨진다. 지방은 다 쓴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두 번 쓰는 지방을 아직 보지 못했다. 숨조차 죽이고 오직 모시고자 하는 이의 영혼을 쓰는 이와 제관들이 함께 정성껏 붓끝으로 모셔 온다.  



싸리나무로 깎고 삐쳐 만든 지방 꼬지 위에 정성스럽게 모시고, 촛대 위의 양초 심지에 성냥불을 그어 대면 초혼이 시작된다.  

팔놀림이나 발걸음이 암묵적으로 어울리며 흐트러짐 없이 연달아 이어진다.   음복(飮福) 후 제삿밥을 먹을 즈음 첫닭 울음이 적막을 깨며 밤나무 가지를 타고 올라 알 밤송이를 흔들고 달 속으로 날아갔다.  

제삿날은 나에게는 조상에 대한 참배이면서 숭조효친(崇祖孝親)의 교육이어서 내 삶의 연속적 반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가의 맏손자이니까!  

여전히 네 방구석을 헤매며 중얼거리는 내 새벽잠은 다시 시작된다. 아침햇살이 장지문을 뚫고 내 엉덩이 떠서 바칠 때까지 늘어지게 자도 아무도 깨우지 못한다. 먼 훗날 당신들의 영혼을 모실 종손이니까.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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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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