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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궤적 2008. 5. 2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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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서 무중력상태의 일 년이 있었다.

이 기간의 자유방임 생활이 오히려 힘들고 고통스러운 한 해였지 않았나 싶다.

사람은 날 떼부터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거나 아니면 어느 집단에 속해서 살거나 그것도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동반자와 더불어서 살되 겉으로 보기엔 홀로 지내는 수도자처럼 살 것이다.

한데, 나는 이 기간에는 가족 구성원이면서도 대화도 안 되고 의사소통도 없는, 나대로의 생활이었다.

집안에서는 나의 진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걱정 때문에 나를 조심스레 대하느라 오히려 방임하는 상태였다. 이러다 보니 나의 하루는 내가 기획하고 내가 실천하는 것이고 이 계획 또한 의논할 이 없이 스스로 판단 결정하는 것이었다.  

화폐, 쓰면서 버는 것이 아니라, 한번 우리 집 안에 들어오면 우리 집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신조, 집에서는 내가 돈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도록 길들여 놓았다.

따라서 내게 주어지는 것은 하루 세 끼 밥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끼 밥도 제시간에 있으면 주되 없으면 그만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노동력이 없으니 빗자루 몽둥이도 껑충거린다는 농번기엔 말할 나위 없거니와 농한기에도 집밖에 나갈 수 있는 날씨엔 언제나 들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또 몹시 추워서 밖에 일하러 나갈 수 없는 때에도 내가 밖에 나가니 피장파장, 못 만나기 마찬가지다.

여행이란 돈 없이 해야 사람 사는 참맛을 안다는 뒤늦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때 내가 인생 맛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하고 새긴다.

그렇게, 훗날 실컷 맛보고 질기게 씹어 볼 수 있는 기회마다 경험이 없는 내겐 행동반경은 늘 좁았고 제자리에서만 두리번거리는, 안주의 몸사림을 했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된 것 같아서 새삼 뉘우친다.

그래도 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집안에 어떤 도움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여름이면 쇠꼴 베는 한 가지 일을 내가 자청해 맡았고, 겨울엔 땔감을 맡되 과하리만치 목표량을 정하여서 쉴 새 없이 산을 오를락 내릴락 했다.

우리 산은 멀고 가팔라서 못 가는 대신에 가까운 산에 가서 나무그루터기 등걸이 오래되어 삭은 것, 이놈을 도끼질로 뽑아서 밑으로 내려보내고, 얼마간의 양이 되면 주어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 일이다.

화력이 약하지만 그래도 군불을 때는 데는 그런대로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런 나뭇등걸은 은근히 타고 오래 타기 때문에 할머니 방의 전용이 되곤 한다.

한 해 동안 허송하지 않고 쇠꼴 짐이나 나뭇등걸 짐을 매일 지고도 부끄럽지 않게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옆에서 도와준 친구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일찍 농삿길을 택했고 그 길로 이미 상당한 이골이 난 터였지만 역시 어리기는 마찬가지니까, 서로가 친구 따라서 강남 간다는 핑계를 만들면서 위로하고 위안받는 꼴이다.

불과 열네 살의 나이에 지게를 진다는 것은 특별한 연유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아버지는 아예 외면하시고 지게도 안 만들어 주었으니 내가 지려는 지게는 아버지의 지게밖엔 없었다.

언덕 밑을 내려가려면 뒷걸음을 해야 하고, 논둑이나 밭두렁을 타고 오르내릴 때도 무심코 가다가 꼬꾸라지기 일쑤다. 그까짓 나뭇등걸쯤이야 다시 짊어지면 되지만 몇 시간씩 짊어서 작품화(?)되다시피 한, 아담한 솔가리(바닥에 떨어진 마른 솔잎) 짐을 처박으면 앉아서 울뿐이다.

운다고 무거운 짐을 대신 저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같이 간 '이기재' 친구만이 우두커니 서서 기다릴 뿐이다.

이따금 장끼 우는 소리가 찬바람을 타고 맑은 하늘에 솟아오른다. 소나무 바람 타는 소리에 그늘 밑 바위 이끼가 말려들며 노란 금빛을 쏟아내면 한나절이 넘고 만다.

시장기도 없고 피곤함도 없다. 다만 솔가리 짐의 예술성(?)보다 흉하게 된 땜질 나뭇짐이 속상할 뿐이다.

또 어떤 날은 여린 짚을 잘 추린 다음 물을 품어서 불린다. 눅눅해진 짚을 세 대식 양손에 쥐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서 두 엄지와 여덟 개의 양 손가락이 어울려서 단단한 새끼줄을 두 발쯤 꼬아서 이 끝을 묶어 곱쳐서 네 가닥을 만든다.

가운데를 다른 새끼줄로 묶어서 길게 허리춤에 차고 두 가닥 된 고리는 양발 엄지발가락에 낀다.

네 가닥 새끼줄 사이에 추린 고운 짚으로 엇갈려서 엮어 당겨 조이고 ‘신총’을 내서 가지런히 만들면 바닷고기 가자미 모양으로 넓적하게 되는데, 이는 신을 삼기 전에 자기 발 너비를 보아서 신 바닥 너비로 조절하면 된다.

뒤꿈치를 내는 일과 '신총'을 꿰고 마무리하는 일이 솜씨대로 가는데, 첫 작품이지만 신을만한 실물로 드러났다.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내 입장을 알아차린 ‘기재’ 어머니는 따로 짝짝이 맞추어 놓았다가 한 죽, 열 켤레가 돼서야 내게 내놓으셨다. 집에서는 모두 놀랐다. 그날에 동그랗든 눈들을 앞앞이 잊을 수 없다.

눈 쌓인 엄동엔 ‘기재’네 집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이듬해 나 홀로 진학하니 그만 인연이 끊어졌다.

살아 있기만을 바란다. /외통-



어린이는 천당의 열쇠이다. (R.H.스토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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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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