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외통인생 2008. 6. 30. 12:38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전환기

1735.000923 전환기

내 일찍이 이 시기만큼 암흑의 터널이었든던 시절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단순하고 명쾌하게 나아갈 길을 찾았고 택했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하고 집일을 돕는 한 해. 그런 대로 농사철은 어줍지 않게 어른들을 도와드린다며 내 딴에는 딴 생각 할 겨를이 없이 도왔지만 동절기인 농한기에 들어서면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서 꼼짝없이 방에서만 지내는 몇 달이 계속 되는데도 내겐 이렇다 할 소일거리가 없다.

 

저절로 친구의 집을 전전하게 되는데 그 때에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신을 집신을 내가 삼는다는 것인데, 매일 빈손으로 친구 집에 가서 진종일 있다가 돌아 올 때는 집신을 한 켤레씩 손에 들고 들어오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작은 이변으로 여겼다.

 

이제는 그런대로 내가 신을 신은 내손으로 삼아서 자급하게 된데 대하여 나 스스로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것이다.

 

갓 해방을 맞은 우리는 우리글과 우리 역사를 일 년밖에 배울 시간이 없었다. 졸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친구들이 다투어 초등학교 재수, 유급을 희망하고 그 길로 들어섰다. 책도 없이 그럭 저럭 시간만 때우고 씨름만 하고 있을 때였다. 그까짓 것 해방된 후 졸업 때까지의 일 년을 혼란스럽게 보내기만 하고 별로 배운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몇몇 친구들과 나는 그냥 일 년의 짧은 기간으로 만족하여 마치기로 했다.

 

해방 후의 초등학교 일 년을 인민학교 전 과정의 육 년으로 가름 한 꼴이니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낙제생 같은 그런 짓(?)이 죽기보다 싫었다. 고작 해야 한글을 배우는 것이 전부이고 그 한글은 우리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내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일 년 후 해방된 곳곳에 중학교가 설립 되는데 그때에 오히려 그들보다 한 학년을 뛰어 이학년에 입학했으니 초등학교 재수생은 중학교 일학년이고 일 년을 쉰 나는 오히려 이학년이 되니 어려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갑절의 노력이 요구되는 부담을 안고 공부해야 하는, 무모한 욕심도 부렸다. 아직 지식에 대한 폭도 깊이도 알 수 없던 때에 상급학교란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이지, 즉 집안 형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그저 듣고 보기만하면 공부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이 시기 일 년은그대로 내 진로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저 어떻게 집안일을 돕고 무위도식이 되지 않느냐가 내 생각의 전부였다.

 

 

손을 뻗으면 이엉이 손에 잡히고 허리조차 펴고 들어 갈 수 없는 친구의 집은 외동아들과 오붓하게 지내는 집이다.

 

친구네 집은 매우 유식한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집안이었다. 친구와 함께 진종일 윗방에서 비벼대는 우리에게 점심때가 되면 화로에 된장찌개를 올려놓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주신 '기재' 어머님을 잊지 못한다. 그 덕이 살아서, 이 조그마한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친구 '이기재'의 어머니시다.

 

언제든지 만나는 날, 그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억을 찾아내게 하리라. 그렇게 될 날을 기다리며 이 하루를 또 지낸다.

 

무슨 의미이고 무슨 뜻이 담기고 할, 따질 일이 아니다. 그냥 그런 때가 내가 사는 인생의 한 점을 찍은 획이 됐다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다. /외통-

 

'외통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문  (0) 2008.07.01
고저음  (0) 2008.06.30
통천친구  (0) 2008.06.30
재수  (0) 2008.06.29
교재와교사  (0) 2008.06.29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