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무엇 때문에 갔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이 어렴풋이 ‘고저 읍’이라는 곳, 휘황한 전깃불이 번쩍이는 거리를 거닐었다.
내 집이 아닌데도 이층집이라면 반해서 죽겠는데, 다락 위에도 올라가 보지 못한 탓에 무척이나 동경하던 그 이층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고 큰 배가 드나드는 곳, ‘고저’에는 볼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내 눈에 비친 ‘고저’는 활기에 차 있고 도시의 면모를 갖춘, 작은 어항을 끼고 문물의 교류와 육 해상 교통이 원활한, 우리 군에서는 제일 큰 읍인데도 모든 ‘관공서’는 별도의 읍이라고 하는 ‘통천’에 집중된 것이 이상했다.
이를테면 뉴욕이 더 커도 수도는 워싱턴인 그것과 같은 꼴이다. 이래서 더욱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거기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五里霧中’이다. 이쯤 되면 비로써 술꾼들이 만취 후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변(辯)에 대해서 조금은 수긍할 만도 할 것 같다. 다만 또렷이 기억되는 것은 비가 왔고 시내를 걸어서 어느 여관에 들러서 하룻밤을 잔 적이 기억될 뿐이다.
더 생각해 보자 곰곰이. 눈을 감고, 정확히 오십칠 년의 세월을 단번에 뛰어넘어서, 나를 까까머리 핫바지를 입혀서 비 오는 거리를 걷게 한다. 걷는다. 점점 어디론가 다가가고 있다. 옳거니, 찾았다. 영화 구경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일요일을 기해서 떠났던 것인데 기차 시간을 놓치고 사 십리 길을 걸어서 가기에는 이미 시간도 늦었으려니와 비가 오는 날씨라 어쩔 수 없이 끌려서 다닌 꼴이다.
가랑비를 줄줄 맞으면서도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한 것들이어서 시간은 그런대로 지나갔지만, 어느새 가로엔 불빛이 길바닥을 빛내며 번들거리게 하는데도 우리는 아직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유랑 아가 됐으니 이를 어찌하려는지 물을 수도, 참견할 수도 없다.
하나씩 둘씩 알음을 찾아서, 친척을 찾아서 빠져나가고 이제 그야말로 올 데 갈데없는 몇이 선생님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데 그때의 외로움이 나를 이토록 못 잊는 ‘고저 읍’으로 만들었다.
알음, 친인척, 이것은 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대의 자산임을 깨닫게 하는 좋은 경험이었다. 무연(無緣)은 이후 강박의 내 삶을 더욱 옥죄는 구실을 은연중에 했다. 이는 다른 아이들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나만의 외로운 분투로 자리하여서 오늘을 있게 한다.
기억의 꼬리를 찾았으니, 영화도 기억해야 할 것 아닌가. 눈을 감는다.
난생처음 보는 천연색영화이고 최고의 감명을 받은 영화였다. ‘미추린:이반 블라디미로비치 미추린’, 한대지방에 적응시키는 각고의 노력으로 사과의 품종을 개량하여서 보급하는 과학자의 집념을 그린 ‘점령군’ 소련 문화 영화였다.
고저는 아름다운 ‘총석정과 갈탄(褐炭) 탄전을 갖고 조그마한 항구도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내게 꿈을 심고 훗날 상급학교랍시고 다니는 인연 깊었든 우리 고장의 명소다.
언제 다시 시계포가 마주 보이는 작은 다리를 건너서 부두에 가볼 것인지 지금으로선 아득하기만 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