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제생이 거치는 과정을 재수라고 생각한 나는 앞집 내 친구 ‘덕재’의 재수, 아니 유급을 용납할 수 없었다. 졸업하면 당연히 상급학교에 진학하든지 아니면 가사를 돕든지 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뛰기는커녕 거꾸로 주저앉는 모양이 마음에 안 들었다.
혼란기의 진학이란 학교가 있는 연고지에선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던 때였다. 외지에서의 유학비용이 마련되지 못했던 나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한 해 동안이라도 가사를 돕기로 다짐했다.
그러니 ‘덕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찾아와서 ‘해방을 맞은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으니 배움도 일 학년생 정도밖에 못 배웠다. 더 배워야 할 것이 아니냐.’는 뜻을 비치고 앞뒷집에서 동무 삼아 같이 한 해 더 보내자고 했고 어머니는 나와 의논해 보겠다고 하셨든 가보다. 난 자존심을 앞세워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학해도 시원치 않은데, 낙제생(落第生)처럼 유급(留級)하다니, 단호히 부당함을 주장하고 한해를 쉬고 진학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부모님의 난감한 입장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즉 책보를 옆에 끼고 배움의 집으로 나가는 ‘덕재’의 뒷모습과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는 내 뒷모습이 함께 눈에 선히 보였을 것이기에 부모님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아들로부터 무언의 저항을 받는 느낌과 탓할 수 없는 주장에 부모님 또한 답답하여 묵묵히 지내셨다.
손재간이 남달랐든 그가 일 년간 얼마나 더 배웠는지는 몰라도 빤한 과정을 다시 일 년 허송하느니 새로운 경험과 체험을 통한 공부도 됐다는, 지금의 내 생각이다.
동생들과 함께 배운다는, 자존심 상하는 짓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느니, 당시의 일 년이 내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울 기회를 잃었던 것은 아쉬운 점이었으나 그 부분은 뒷날 책을 읽음으로 얼마든지 보충되었다.
결국 명분을 잃지 않은 나의 행동은 계속되어서 신설되는 중학교에 오히려 ‘덕재’보다 한 학년을 건너뛰어 2학년에 시험 봤고 그는 순서를 밟아서 또 중학교 일 학년에 밟아 올라오니 이번에는 거꾸로 그보다 한해를 앞선 꼴이 됐다.
나의 옆 돌아보지 않는 버릇은 이미 이때부터 싹이 자랐나 보다. 나의 이 못된 성정은 지금도 살아서 사람을 사귀는데 다른 이들보다 시간과 노력을 더 하는, 헛된 짓을 하곤 한다.
내가 먼저 내 약점을 보여야 남도 그의 약점을 들어내는 것이거늘 티끌만 한 배움으로 태산 같은 지식을 쌓아 묵직이 거동하는 모든 이와 접촉한다는 것은 내게는 전쟁터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척후병의 구실로밖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신중함이 필요했다. 이것이 지금도 내 행동의 근저(根底)를 지긋이 짓누르고 있다.
앞뒤가 있을 수 없는 배움에도 이토록 주위를 의식한 나였기에 일찌감치 그 대열에서 이탈하여 아무도 대 볼 수 없는, 나만의 생을 살고 있다. 지금이야 유급이 아닌 재수가 된들, 삼사수(三四修)가 된들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겠지만 당시의 시골에선 그렇질 못했다. 겨우 200여 호 되는 마을에서 그것도 세 성(三姓) 바지가 못자리해 놓은 듯이 사는 동네에서의 내 형편은, 마음은 추진체에 연료가 빠진 로켓같이 옴치고 뛸 엄두를 정말로 낼 수 없던 때였다.
그러나 연료는 스스로 마련됐다. 그것이 용기였다. 우선은 발사대를 높이고 여기서 연료를 태울 것을 모색했으나 전쟁으로 또 중도 불시착으로 이번에는 연료의 탱크조차 파열되고 말았다. 이후 영영 추진체는 복원되질 못했다.
제도적 단계의 교육이 필요하나 반드시 반복 훈련식 교육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에 후회는 없지만, 누가 인생을 한 번 더 유급(?)하라고 하면 기꺼이 할 것 같다.
이것은 내 본심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