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은 깡그리 중단되고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지만, 소비만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었다. 그러니 무엇인들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을 턱이 없다. 종이는 말할 나위 없다. 종이뿐만 아니라 등사(謄寫)기도 형편없이 낡아서 망이 터지고 구멍이 났지만, 손을 쓸 방도가 없었던 시절, 교재가 있어도 인쇄를 할 수 없는, 해방 직후였다. 더군다나 교육시책이 마련되질 못했으니, 우리가 배울 책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 손에 들여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그 교실에 들어갈 선생님 스스로 교재를 마련하고 챙겨서 가르쳐야 하는, 어쩌면 지극히 편한 가르침과 배움의 한때였다.
내남없이 낯선 우리 말과 글을 배우면서 묻혔던 우리 문화와 과거를 알아봐야 하는 우리, 모두는 함께 병아리였지만 문리(文理)가 트인 선생님이 우리를 월등히 앞질러서 가르치긴 하는데, 때로는 어린이들과 대토론이 벌어질 때도 간간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우리의 눈알은 회전 속도를 더해갔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지침이 저녁에 달라지는 것이 예사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은 번번이 그 얼굴이 바뀌어 낯설었다. 많은 이가 이남으로 떠났다.
불과 이삼 년 전까지 운동장에서 우리와 함께 뛰놀든 학생이 몇 달간의 단기 강습을 받고 교단에 나타나는 졸업생도 있었고, 사범학교를 갓 나왔긴 하지만 그들 또한 우리글과 문화에서는 문외한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린이들은 각기 자기 공부는 자기가 알아서 무엇이든 습득하는 처지가 됐어도 누구 하나 시비하는 사람이 없는 터다. 저마다 나라의 앞날만을 크게 걱정할 뿐 조무래기 우리에겐 눈길 주는 이 하나 없다.
유일한 교본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인데, 장사꾼 장기(掌記) 챙기듯이 열심히 챙겨서 씨름함으로써 우리의 얼이 무엇인지를 더듬었다.
그럭저럭 가을이 돼서 학예회를 한다고 야단이지만 뾰족한 묘책을 찾지 못하고 시간은 자꾸 다가왔다.
우리 동네에서만 속성교사 양성소를 나온 선생이 대여섯 됐고 이들 중 불행(?)하게도 모교인 우리 학교에 배속돼서, 그들 선생이나 배우는 우리 어린이나 함께 고통받았으니, 하루아침에 교사로 달라진 상급생 누나의 신분을 받아 들어야 하는 어색함도 겪어야 했다. 그들 선생님 또한 밑천을 환히 들여다보는 어린 학생들을 향해서 눈길을 마주 부닥쳐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학예회를 맞는 이들 고향 선배 선생은 자기들이 경험한 일본식 교육을 바탕으로 저마다 꾸려서 막을 올렸지만, 예견했던 대로 찜찜한 앙금만 남았다.
즐겁고 기뻐해야 할 학예회가 마냥 우울하다. 못 볼 것을 본 것같이 부끄러운 낯을, 서로가 민망해서 마주 보지 못하고 피해야 하는, 후유증을 낳았다.
한 선생이 올린 극은 일본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었다. 두 학생이 무대에 나타나서, 그중 한 학생이 스승으로 되고 다른 학생이 제자로 되어서 가르치고 배우는데, ‘침묵’의 가르침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이제부터 ’침묵‘을 시작한다. 말하는 쪽이 이 침묵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더 많은 소양을 쌓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부터 ‘침묵 시작.’ 마주 놓은 걸상 위에 단정히 앉아있는 스승과 제자는 말없이 십 분가량 보냈다. 무대를 바라보는 학생과 교사들의 침묵이 함께 흘렀다. 오 분이 더 지났다. 이때 제자가 손을 움직였다. 즉각 스승이 ‘자세를 바르게!’라고 일렀다. 일제히 웃음이 터졌고 무대 위의 제자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스승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가 수양이 덜 됐네!’ 하고 막은 끝났다. 지극히 간단하고 단조롭게, 싱겁게 시간만 보낸 한 토막극이었다.
한 속성 양성소 출신 선배 교사는 여자이기에 여자애들에게 ‘유희;遊戲’를 시키고는 오르간 반주를 못 하니까 육성으로 ‘랄랄 라라라라 랄라라 랄랄라…’ 경쾌한 리듬을 무대에 보냈고 이 육성 리듬에 맞추어서 춤추는 여자애들의 얼굴은 그래도 진지했다. 무용은 대여섯의 어린이들이지만 후 평을 할 이는 아무도 없는, 독무대고 자기만족이었다.
이제 돌이켜본다. 그 시기에 ‘무언의 교훈’을 올린 교사나 ‘랄랄라라랄라…’의 육성 리듬 무용을 올린 여자 선배가 보는 교단은 한없이 높게 보였을 것이고, 다른 한편 어린이들에게는 교실의 책걸상이 앉기 어려운 가시덤불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을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들은 끊어지는 실올을 잇는 매듭이 되었고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자녀가 어설픈 그때의 학예회 연극과 유희 이야기를 듣고서 옛이야기로 귀 흘려 넘긴대도 세상을 이어가는 징검다리의 디딤돌이 된, 그때 그 학생과 선생들한테는 지금도 한없는 애정이 쏟아지는 ‘무언의 교훈’과 ‘랄랄라’ 무용이었음은 숨길 수 없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