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1 거제리

외통궤적 2008. 7. 1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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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0.010725 수용소1 거제리

기차는 한밤중이 돼서야 출발하는 것 같다. 하얀 먼지로 채색된 온몸에 새까만 탄가루가 엉겨서 우리의 몰골이 회색으로 변해간다. 회색이다. 검지도 희지도 안은 회색, 회색의 의미가 나를 잠시 괴롭히고 번민하게 한다.

 

잡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회색의 바탕이 마련된 것일까? 뿌연 먼지, 새까만 탄가루가 폐부에 스미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얼룩진 땀 냄새와 버무려져서 콧구멍 을 막 들추어 휘젓고 있다.

 

우리는 숨막히는 지옥 길을 가고 있다. 호송미군은 부상자의 신음을 신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듣고도 외면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도 어쩔 방도를 찾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지, 비명으로 호소하는 우리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의 뒤 물림에만 신경질을 내고 있다. 그들은 화차의 양쪽 문과 문 사이에서 양쪽으로 일 미터 가량 들여서 총칼로 금을 그어놓고 반대편 안쪽을 보고 서있는 우리들이 흔들려 움직이며 뒷걸음쳐서 그 선을 넘으면 총부리로 막 쑤셔댄다. 그러니 너도나도 총부리에서 멀어지려고 안으로 파고든다.

이렇게 파고 들다보니 그은 선은 그대로 확보되지만 기차가 얼마간을 달리면 조금씩 헐겁게 되면서 누군가는 그 금을 뒤꿈치로 밟게 된다.
또다시 총칼로 등을 밀면 그 자극을 받고  비로써 안으로 움직여 들어간다.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 수 십 번, 나중에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총질까지 한다.


총소리에 놀란 우리는 더욱 고개 숙이고 안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이 총소리에 누군가가 희생됐으리라는 추측이 들기 때문이다. 그 실 희생자가 있은들 어찌하랴! 그들은 아마 허공에다 쏘았으리라.

 

이런 과정에서 부상자를 쥐어짜다시피 하게 되고 부상자들의 단말마 소리가 또 흑인병사의 총칼에 힘을 싣는다. 우리는 화차에 실려 가는 살아있는 고깃덩이 화물인 것이다.

 

 

동이 틀 무렵에 어느 역에 당도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군인들이 길 양 쪽에 도열해 있는 사이를 걸어서 한적한 산 밑으로 들어가고 있다. 옳다. 여기가 사형장인 것이다.

 

푸르고 한적한 우리고장 가을 풍경이다. 벼가 누렇게 익어 있고 한쪽에서는 한창 벼베기를 하고 있다. 산모퉁이를 하나 돌았을 때다. 거기엔 별천지가 전개되고 있다.


방금 벼를 베어 걷어나가는 논둑을 무너뜨리고, 다지고 메우기 일을 하는, 거대한 기계를 보면서 비척거린다.
걷는 발걸음이 꼬여서 자주 넘어질번 하면서도 그 기계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산더미 같은 흙을 밀어내는 저 기계는 우리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묻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다.

 

차츰차츰 모퉁이를 돌아들어서면서 넓게 펴져 나간 골짝의 태반이 이렇게 파 헤쳐 놓은 생땅이니 여기가 바로 우리가 묻힐 곳이구나 싶어 체념의 마지막 숨을 고른다.

 

군인들이 줄지어선 터널을 힘없이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진종일 밤낮을 물 한 모금 못 얻어먹고 여기까지 왔으니 걷는 것도 덤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 또한 덤이다.

 

 

군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천막을 치다 말고 우리의 걸음을 지켜 바라보고 있다. 그중 한사람이 우리를 향해서 크게 외친다.

 

‘당신들은 살았다! 여기는 죽이는 곳이 아니다!’ ‘정말 죽이지 않습니까?’ 우리중의 한 사람이 급하게 물었다. ‘나를 보시오! 나도 당신처럼 붙잡혀서 온 사람이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하늘의 구름이 밀려 내려오는 착시가 일었다. 구름은 유난히 희고 엷다. 그리고 솜같이 포근히 나를 싸안았다. ‘이제는 살았구나.’ 환호와 함께 다음 생각이 이어진다.

 

‘얼마 안 있어서 곧 통일이 될 거요! 지금 북으로 밀고 올라간다니까?’ 그가 말한 이 소리가 자꾸 떠올라서 나를 흥분시킨다. 모든 것이 급변하여 어리둥절하다. 해방을 맞을 때와 엇비슷한 충격이다. 몰골이야 어떻든 내 생각만은 번개같이 빛난다.


‘그렇다면 우리도 방면이 될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쁜가?  비로써 살아 있는 나를 실감했다. 대견함, 요행, 가호…. 이 순간까지 살아온 지난 일들이 얽혀가며 끊이질 않는다.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도착하는 포로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트럭들이 골짝을 뒤덮고 있다.

 

지금 한창 벼를 베는 논 한쪽 귀퉁이에 큰 가마를 몇 십 개씩 걸어놓고 넓고 높게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짖는 저 밥은 내게 언제나 차례 질 것인가? 살았으니 이번에는 먹는 것도 눈에 든다.

 

 

우리는 한쪽에 마련된 빈 터에 겹겹이 줄지어서 앉고 통역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지시를 받고 있다. 우리의 모양새가 먼저 온 저네들의 형편에 비해서 구경거리라도 되었든지, 우리 주위에는 군복을 입은 포로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통해서 듣는 바로는 밥을 미처 짓지 못해서, 밀려오는 포로들에게 나누어줄 수 없단다. 하루 한 끼고, 운이 좋으면 두 끼 정도란다. 쌀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놓고도 미쳐 설비를 갖출 시간이 없도록 밀려드는 포로다.

 

부산 ‘거제리’ 골짝은 잡혀온 사람으로 들끓고 있다. 우리가 들어간 날 오전 한나절사이에 벼를 벤 논배미 몇 개가 벌서  포로들로 꽉꽉 들어차고 있다. 아마도 오후가 되면 더하지 않겠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가 되니 또 몇 배미의 논에 들어차고 있다. .

끊임없이 펼쳐지는 텐트 치기와 밥해 나르기가 이 골짝을 메운다. 미군과 포로로 된 ‘인민군’이 벌이는 날 가는 줄 모르는, 소리 없는 싸움이다.  

 

내가 논두렁 밑 웅덩이에서 얼굴을 씻고 있노라니 미군들이 우리를 한곳으로 개새끼 몰듯 몰아붙이더니 흰 밀가루를 품어서 우리의 머리와 몸 전체에 뒤집어씌운다. 이름 하여 D.D.T다.

 

이때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을 뒤집어쓰면서도 이것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아는 데는 한참시간이 걸렸다.


이제 이 분무작업을 하는 군복 입은 사람은 미군도 국방군도 아닌 우리와 같은 처지의 P.W들이다. 그날 저녁엔 천막 안에 들고 이틀 만에 첫 쌀알을 씹었다.

 

불면 날아갈 뜻한 안남미(安南米) 쌀이란다. 그래도 이 밥은 생명의 약이다. 팬티 하나 러닝셔츠 하나, 위아래 작업복 군복 한 벌, 모자 한 개, 양말 한 켤레, 훈련 화 한 켤레, 모두 앞뒤 에 검거나 흰 페인트로 커다랗게 글자가 씌었지만 이제까지 입던 인민군복 보다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질기고 튼튼해 보였다.

 

그러나 이 옷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님에도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내가 억류되어있는 몸이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는 다시 생의 보상으로 받아야한다고 애써 도리질한다. 천막에도, 연장에도, 취사도구에도, 예외 없이 박힌 P.W(Prisoner of war)다. 전범자로 낙인 된 우리를 바깥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맞을 것인가?



지극히 서글픈 일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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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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