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릉지

외통궤적 2008. 7. 1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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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010730 누룽지

차츰 보급품이 도착 되면서 하루 두 끼는 얻어먹을 수 있었다.

비록 제때 찾아 먹을 수는 없었지만 두 번이라는 횟수는 꼬박 지키게 되었는데, 식사 때는 터무니없이 늘었다 당겼다 한다. 순번을 바꾸어 가면서 준다고는 하지만 꼭두새벽에 아침을 먹고는 해가 아직 중천(中天)일 때 저녁을 먹어야 하고, 끝머리 차례는 점심때쯤 아침을 먹고 저녁은 한밤중에 밤참처럼 먹게 되니 끼는 끼지만 때 없이 밥그릇 들고 밖에 나가게 되어 이번에는 먹는 싸움이나 다름없다.

우리들의 처지는 말 그대로 먹기 위해 사는 꼴이다. 이러니 나 같은 소식가야 견디어 낼 수 있지만, 스무나무 살 먹는 장정들이야 환장이 돼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배고픔 따위는 한낱 사치였지만 생존의 희망을 얻고도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한 매일을 산다는 것 또한 다른 고문에 진배없다.

오직 먹는 위안(慰安)에 사는 우리, 거지반이 이런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니 밥 냄새라도 맡을까 하여 노천에 차린 취사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늘어난다. 행여나 폭동이라도 일어날까? 싶은지, 철조망 안에 들어와 있는 미군들은 곳곳에 서 있는 망루 경비병의 비호하에 취사장의 난동을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지킨다.

그렇지 않으면 물밀듯이 밀려가서 진을 친 취사 역 포로들의 울을 무너뜨릴 판이다. 그래서 단단히 진을 치게 하고 이들을 지킨다. 그런데 냄새라도 맡고 싶은 포로들은 이제는 취사장에서 나오는 누룽지를 달라는 것이다. 미군들은 밥을 지을 때 솥에서 누른 누룽지를 달라는 데 한동안은 응하질 않았다. 저들의 기준으로 볼 때 음식으로 치지 않았을 터이고, 따라서 이를 버리는 것이 온당한 것으로 알았을 일이다. 그러다가 미군들은, 포로들의 완강한 요구에 쫓았고 그 누룽지를 취사장 언저리에 서 있는 포로들에게 선착순으로 한 줌씩 나누어주었다. 자연히 줄이 생겼다. 옷섶에 받는 사람, 모자를 벗어서 받는 사람, 아예 웃옷을 벗어서 받아 가는 사람, 심지어 양말을 벗어서 받는 사람, 그도 저도 마련이 안 되는 사람은 팔장을 끼고 그 위에 담는 사람도, 있다.

첫날 나도 옷자락에 받아 오긴 했어도 그다지 먹을 만한 게 못되었다. 과자같이 노랗게 익어서 바삭거리는 얇고 고소한 누룽지를 긁어 밥 강정이라 하시며 주시든 어머니의 누룽지가 아니었다. 쇄 빠져서 못 먹을 호박잎 같고, 구멍이 숭숭 한 떡잎 깻잎 같고, 줄줄이 달았든 고구마 줄기 같아서 먹을 수가 없다. 타다 못해 무쇠솥의 쇠붙이가 긁혀 올라온 듯, 숯가마에서 나무껍질을 떼어 낸 듯, 검고 억세다. 모양은 제쳐놓고라도 입안에서는 숯가루가 겉돌고 쇳가루를 씹는 것 같다. 그래도 곡식을 태운 것이라서 그런지 우물우물 씹어서 뱉어내고 우려서 물만 먹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시혜(施惠) 누룽지’가 ‘보상(補償) 누룽지’로 바뀌어 분뇨통 메다 쏟는, 작업하는 포로에게는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다. 철조망을 보수한다든가 새로운 수용소의 울타리를 치는 작업을 할라치면 이런 보상 누룽지는 없다. 매일 줄을 서서 기다리는 포로들의 뼈저린 사연을 알고 있는 일부 포로들이 자기 입지를 높이려는 짓, 거꾸로 이용하여 아부하려는 못된 버릇, 우리들의 고질이 나타나고 있다. 포로 중 누군가의 발상이 틀림없어 우울하게 하는 것이다.

난 분뇨통을 메고 작업함으로써 얻어먹는 누룽지의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통을 메기 위해서, 누룽지를 타 먹기 위해서, 줄을 서질 않았다. 난 차라리 배고픔을 참는 것에 더 익었는지 모른다. 아마 이 성정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잖게 역 작용할 것이란 생각도 해 보지만, 전혀 내키질 않았다.

바둑판같이 잘게 쪼개서 촘촘히 엮어놓은 철조망 사이로도 밖의 정경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청주의 ‘감옥’ 시설과 같은 담장이 없는 것만 해도 숨통이 틔었고 걸음걸이를 할 수 있으니, 독방에 비해서 격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고 행이랄 수 있겠다.

분뇨통을 멘 일단의 포로들이 ‘국방군’의 물샐틈없는 호송(?) 아래 외부 세계로 나간다. 공기를 마시려고, 우리와 다른 인간들의 숨결을 느끼려고, 허기진 창자를 숯덩이로 채우려고, 오늘도 어제의 그 사람들은 같은 일을 반복한다.

체중 사십육 킬로그램의 내가 저들과 함께 출렁이는 분뇨를 균형 잡아가며 메고 울퉁불퉁 자갈길과 논두렁길을 간다는 것은 어림없을 것 같다. 차라리 속 편하다. 사상 최상의 향내가 바람에 실려 다시 철조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와서 한바탕 휘젓고 사라진다. 망루 위의 ‘국방군’ 아저씨가 경상도 사투리로 무어라 씨부렁거린다.

제 속에 가득 찬 향은 제가 맡을 수 없으니 남의 향으로 제 것을 가늠할밖에, 나는 내 배를 내리 보고 망루를 한번 올려본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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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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